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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동수 Sep 28. 2024

일제강점기 죽서루에 세운 '천장지구비'를 아시나요?

한일병합(1910년 8월 29일) 후인 1910년 11월 25일 강원도 삼척군에 주둔한 헌병분대의 모습이 담긴 사진 자료에서 헌병분대장 가등(加藤, 가또) 중위가 삼척의 양반 유생들에게 일본 천왕의 은사금을 수여하는 활동 상황과 관련된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1910년 11월 25일 조선 강원도 삼척 헌병분대 분대장 가등(加藤) 중위가  은사금(恩賜金) 어사태서(御沙汰書, 소식을 적은 문서)를 수여하는 광경    

 

1910년 11월 25일 삼척군 기로자(耆老者, 연로하고 덕이 높은 사람)에 대하여 삼척 헌병분대장 가등(加藤) 중위가 은사금 어사태서를 수여하는 광경. (출처: 홍협)


은사금 수여 약 1년 후인 1911년 12월 6일 자 《매일신보》에는 1910년 11월 25일 은사금(유생 1인당 15원=현재 가치 약 75만 원, 1910년 1원=현재 5만 원 상당 기준)을 받은 삼척의 양반‧유생 38명*이 일본 천왕의 은혜에 감격하여 1911년 11월 3일 천장가절(메이지 천왕 생일)을 맞아 그 공덕을 기리고자 삼척 죽서루 옆에 ‘천장지구(天長地久)’라고 새긴 비석을 세웠다고 하며 그 기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은사금을 받은 양반 유생의 명단은 명치 43년(1910) 11월 3일 자 《조선총독부 관보 호외》에 실려있다.


천장지구, 《매일신보》, 1911. 12. 06.


천장지구

 “강원도 삼척군에서 상치(尙齒, 노인을 존경함)의 은전(恩典)에 욕(浴)한 최동욱(崔東昱) 외 37명의 양반 유생은 성은(聖恩, 메이지 천왕의 큰 은혜)의 우악(優渥, 은혜가 매우 넓고 두텁다)하심을 감격하여 성덕(聖德, 메이지 천왕의 덕)을 만세에 전하기로 거월(去月, 11월) 3일 천장가절(天長佳節, 메이지 천왕의 생일)에 복(卜, 점을 쳐서 가려 정함)하여 동군(同郡) 읍내 서단 죽서루의 측(側)에 고(高, 높이) 8척(尺) 5촌(寸) (약 255cm), 폭(幅, 넓이) 2척 4촌 (약 72cm), 후(厚, 두께) 8촌 (약 24cm)의 기념비를 건립하고 기(其, 그) 기석(基石)은 융기한 천연의 대반석(大盤石)을 이용하였다는데, 전면에는 ‘天長地久(천장지구)’ 후면에는 ‘明治 四十四年(1911년) 十一月 三日(11월 3일) 立 天皇在上 葛人西蜀 命我總督 召化南國 恤窮褒節 耆老兩班 勸業省稅 臣民一體 江原道 三陟郡 兩班耆老(양반기로) 崔東昱(최동욱) 金炯國(김형국) 外 三十六人’이라 서(書)하고, 건립 위치는 풍광이 명미(明媚, 경치가 맑고 아름다움)하고 조망이 절가(絶佳, 더없이 훌륭하고 좋음)한 강원도 팔경(八景) 중 유명한 처(處, 곳)이라더라.”

〈출처: 2017년 12월호(통권 255호) 민족문제연구소 회보〉

     

위 기사 내용 중에서 비석 후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天皇在上(천황재상) / 천황이 하늘에 있어

葛人西蜀(갈인서촉) / 갈인이 사는 서촉에

命我總督(명아총독) / 우리 총독을 명하여

召化南國(소화남국) / 남국에 교화를 펴네

恤窮褒節(휼궁포절) / 불쌍한 자 구휼하고 절의를 포상하니

耆老兩班(기로양반) / 나이 많은 양반들이

勸業省稅(권업성세) / 직업을 권장하고 세금을 잘 내어

臣民一體(신민일체) / 신민이 한마음으로 충성하네  

   

 * 갈인(葛人)이 사는 서촉(西蜀)은 노나라 때 복속한 나라 이름인데 여기서는 우리나라 조선을 간접적으로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고전번역원  

   

 2. 1911년 11월 3일 천장가절(메이지 천왕 생일)을 맞아 그 공덕을 기리고자 삼척 죽서루 옆에 세웠다는 ‘천장지구비’의 모습이 남아있는 사진은 다음과 같다.

  

죽서루 내에 세워진 ‘천장지구비’ Ⓒ1915년 유리건판, 조선총독부


‘천장지구비’를 보고 있는 사람들, Ⓒ『강원도 명소 구적(1927)』


현재 죽서루 내 ‘천장지구비’가 세워졌던 암반에 돌을 덮어 놓은 모습


<몇 줄 평>     

 어두운 역사도 새겨서 알아 두어야 할 것 같아 무거운 마음으로 작성해 보았습니다.

 한일병합(경술국치) 전 조선이라는 나라가 정치의 잘못과 함께 가혹한 세금만 거둬들이고 백성들에게 베푼 것이 별로 없다고 하더라도 지역 사회에서 중심을 잡아 주어야 할 양반 유생들이 일왕에게 고작 1인당 15원(약 75만 원 상당)을 받고 감격하여 이런 글을 써서 비석을 세웠다는 것이 참으로 개탄스럽습니다. 신문 기사의 내용을 보면 일제의 강요로 한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이 글을 쓰는 내내 씁쓸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오래 기억하고 기록하여 교훈으로 삼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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