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월 15일, 첫출근에 어울리는 완벽한 복장을 준비한다.시베리아 벌판도 횡단할 수 있을 보온성과 북극곰이 공격해도 파괴되지 않을 내구성, 파릇파릇한 자연의 기운으로 지친 체력을 단번에 회복시켜 줄 전설급 방어구가 필요하다. 아주 먼 옛날, 등산은 커녕 집 밖에 나가지도 않는 나를 위해 엄마가 사준 초록색 등산복이 생각난다. 침대 밑 먼지 깊숙이 박혀있는 상자 속에 있는 등산복을 꺼내 입는다.
내복은 이미 입었다. 이제 나는 무적이다.
면접관은 오후 1시까지 방송국 앞으로 오라 했지만 혹시나 늦으면 큰일날까 2시간이나 일찍 도착해 버린다. 처음에는 약속시간까지 벤치에 앉아 시간을 때워보려했지만 그러기에는 날이 너무 춥다. 게다가 벤치가 금속 제질이라 계속 앉아 있다가는 엉덩이가 얼어버릴거 같다. 마침 점심시간이기도 하니 점심을 먹기로한다. 내가 택한 최후의 만찬은 실패 없는 돈가스이다. 식당 아주머니께서 혼자 왔냐고 웃으며 물어주신다.
나는 프로 혼밥러이다.
밥도 다 먹었겠다. 더 이상 시간 끌 이유가 없다. 당장 면접관에게 나의 도착을 알리는 전화를 건다. 전화를 받은 면접관은 곧 나가겠다는 말만 남긴 채 곧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자기 할 말만 하고 끊어버리는 그에게서 사뭇 달라진 나에대한 태도가 보인다. 곧이어 방송국 정문을 통해 나오는 면접관이 보인다. 그리고 그의 등 뒤에는 내가 걱정하던 조폭 자이언트 두 명이 따라 붙어 있다.
곧바로 90도 폴더 인사를 박아버렸다.
조폭 자이언트 두 분은 단순히 덩치만 큰 게 아니었다. 이 추운 겨울날에 반팔 티에 얇은 바람막이 겉옷뿐이다. 나도 덩치하면 꿇리지는 않는데 내복까지 껴입은 나와 너무나도 대조적이다. 게다가 첫 만남인데 말없이 고개만 까닥이며 인사만 할 뿐 대화는 사치다. 그들은 진정한 상남자이다. 본능적으로 건방이게 굴었다간 그대로 황천행임을 느낀다.
물론 글의 재미를 위할 뿐 쫄지는 않았다.
반면, 호빗 면접관은 앞으로 자기가 같이 일하게 될 상사이고 10년은 더 나이 많으니 말 편하게 하겠다며 자기 자신을 부장님이라 부르라 한다. 시작부터 말이 많은 게 조폭 자이언트 두 분과 너무나도 다르다. 물론 내 알 바는 아니다. 상대가 뭐라던 난 내 할 일만 하면 그만이다. 중요한건 이제부터 이 자가 나의 직장 상사라는 사실뿐이다. 우렁찬 목소리로 화답한다.
"네 알겠습니다. 부장님!"
내가 마음에 들었는지 호빗 면접관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보인다. 그리곤 밥이나 먹으러 가자며 곧장 앞장서기 시작한다.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첫 번째 위기가 왔음을 느낀다. 5분 전에 먹은 돈가스가 아직 소화되기도 전이다. 밥 먹고 왔냐며 물어볼 법도 한데 이미 부장은 식당 쪽으로 가고 있다. 당장 앞서가는 부장에게 밥 먹고 왔다고 말하고 싶은데 참아야한다. 이미 부장과 나 사이에 거대한 조폭 자이언트 두 분이 가로막고 계시기 때문이다. 어떤 형태의 에너지든 절대 그 두 분의 심기를 건들면 안된다.
나는 평화의 수호자이다.
두 번째 점심은 설렁탕이다. 혹시 돈가스집에 또 들어가면 식당 아주머니가 날 알아보고 왜 또 왔냐며 물어보면 어째야 하나 고민했는데 일단 첫 번째 위기는 넘겼다. 이제 남은 문제는 두 번째 점심을 해결하는 것뿐이다. 자연스럽게 대화를 하며 시간을 끌어보려 했지만 다들 신입인 내게 관심 제로 상황이다. 자기들끼리도 아무 말이 없다. 보통 신입이 오면 어디 사냐, 뭐 하고 살았냐 등 이것저것 궁금한 걸 물어볼 법도 한데 정말 아무 질문이 없다.
그때 조폭 자이언트 한 분의 핸드폰이 울린다.
이제까지 아무 말도 없었기에 그들의 목소리조차 듣지 못한 상태이다. 당연히 나의 모든 신경은 그가 뱉을 말에 집중된다. 나는 글을 쓰는 작가라 말하는 자이다. 타인의 언어, 목소리, 행동, 습관, 시선 등으로 그 사람을 그려낸다. 숨으려 해도 소용없다. 나의 통찰은 상대의 심연까지 꿰뚫는다. 당신이 뱉을 한 마디 한 마디로 성장 배경, 심리상태, 추구하는 이념과 가치, 현재의 고민, 오늘 입은 팬티 색... 그 전부를 분석해 주겠다.
나는 작7ㅏ다.
허나, 그런 나조차도 그를 판단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의 언어가 생전 처음 들어보는 외국어였기 때문이다. 그제야 이곳이 어디인지 다시 한번 상기한다. 이곳은 대한민국의 메이저 방송국이다. 직원 하나하나가 제2외국어는 기본이었던 것이다. 괜히 영어 한다고 입 한 번 뻥긋했다간 큰일 날 뻔했다. 이 점심은 내게 큰 교훈을 주었다. 괜히 두 번 먹는다고 불평이었던 나 자신에게 설렁탕 원샷이라는 극형을 내린다. 깍두기는 사치다. 이를 지켜보던 부장이 뜬금없이 한마디 한다.
“얘네 몽골인이야”
그렇다! 조폭 자이언트, 그들은 몽골인이었던 것이다. 나와의 첫 만남에서 고개만 까닥인 건 시크한 게 아니라 한국말이 서툴러서 말을 안 한 것뿐이었던거다. 하지만 내가 놀란 부분은 그 둘의 생김새이다. 보통 외국인을 보면 같은 동양계 사람일지라도 한국인과의 차이를 느낄 수 있는데 이 둘은 처음 봤을 때부터 그 차이를 전혀 느끼질 못했다.
정말 한국인과 똑같다.
식사가 끝나고 드디어 방송국 내부로 입장한다. 허술하기 짝이 없는 방송국 보안 시스템을 거쳐 로비 구석에 위치한 원형 계단을 통해 지하로 내려간다. 지하복도 끝에는 육중한 문이 있는데 살짝 열린 문 사이로 망치 소리가 들려온다. 문짝에는 '안전모는 생명'이라는 포스터가 붙어 있지만 정작 그 곳에 일하는 그 누구도 안전모를 쓰고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