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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든 햇살 Aug 23. 2023

결말

  

   언니들이 모두 학교에 가고 나면 집안이 조용해졌다. 시장 갈래? 하고 엄마가 물으시면 갈등이 시작되었다. 말랑말랑 따끈한 수수부꾸미를 먹을 기회와 겨루는 것은 이야기 놀이였다. 먼저 집안의 모든 인형을 모았다. 돼지저금통, 여자아이 인형, 그리고 장식용 사슴도 있었다. 하나씩 이름과 성격을 정했다. 목소리를 바꾸어가며 일인 다역을 시작했다. 나쁜 편과 착한 편의 갈등이 있었다. 장에 다녀온 엄마가 방문을 살짝 열어보곤 아직도 혼자 중얼대고 있냐고 신기해하셨다. 이야기는 언제나 착한 편이 이기는 해피엔딩을 향해 달렸다. 그것이 내가 아는 모든 결말이었다.  

   언제부터인가 나의 이야기엔 왕자와 공주가 등장했다. 엄마가 잘 시간이라고 이불을 깔아 주시면 머릿속에서 이야기가 솔솔 떠올랐다. 이불 속에서 언니의 귀에 입을 대고 소곤대다가 졸음이 몰려오면 서둘러 왕자와 공주를 결혼시켜버리고 행복하게 잘 살았다고 끝을 맺었다. 졸음이 몰려와 횡설수설하다가 이 공주와 다른 이야기 속 저 왕자가 결혼하기도 했다. 언니는 엉터리 얘기 그만하라고 내 옆구리를 꼬집었다. 낄낄거리다가 마침내 엄마한테 한 소리를 듣고서야 입을 다물었다.

   왕자와 공주가 결혼한 후 영원히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게 다 거짓말이라는 것을 아는 데는 오랜 세월이 걸리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어쩐 일인지 나를 울린 엔딩에서 조금씩 아름다움을 느끼게 된 것이다. 나를 그 간접 슬픔에 머물게 하고 더 깊은 생각으로 들어가게 했다. 꿈꾸었던 완벽한 해피엔딩에선 어쩐지 식상함과 가벼움을 느끼게 된 것이다. 이야기가 잘 짜여있어 피할 수 없는 결말로 이어질 때, 나는 그 슬픔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큰딸이 네 살쯤에 그림책을 읽어주다가 당황한 적이 있었다. 계절이 바뀌면서 남쪽으로 긴 여행을 떠난 새들의 이야기였다. 아기 새가 엄마와 무리를 잃어버리고 홀로 남게 되었다. 아기 새는 혼자 이곳저곳을 방황했다. 아기 새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다시 힘을 내어 날갯짓하는 장면에서 서둘러 페이지를 넘겼다. 그런데 다음 장면이 없었다. 그림책에서 이런 황망한 결말을 보다니! 딸이 갑자기 으앙! 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당황한 나는 얼른 아이를 안아주었다. 나중에 엄마를 찾았대요, 하고 급히 마무리했지만, 딸은 엄마를 찾은 거 맞느냐고 자꾸 물었다.   

  친구들과 종종 사다리 타기를 했다. 나는 과잣값을 지불하거나, 가만히 앉아 과자를 얻어먹기도 했다. 처음에 어느 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이미 결과가 정해져 있다. 내 삶의 이야기는 이런 우연보다는 내가 닿을 결말을 피해 가지 못할 정도로 탄탄한 서사이길 바란다. 방향을 정하는 갈림길마다 내딛는 걸음걸음에 이유와 의미가 담기길 바란다. 웃는 날이나 우는 날이나 그 기쁨과 고통의 의미를 숙고하고 또 기록하길 원한다.

   소설의 결말은 자연스럽게 흘러나와야 하지만 너무 뻔히 보여서도 안 된다. 독자가 예측할 수 없는 점이 있어야 재미있는 소설이 된다. 그러나 그것이 내 삶의 이야기라면 어떨까. 남의 이야기에 왈가왈부하지만, 정작 내 이야기의 끝은 내 손이 닿지 못하는 영역일지도 모른다. 결말보다는 서사에 집중하고 싶은 이유다. 나는 써 내려갈 뿐이다. 구불구불 붉은 고구마 줄기를 따라가면 같은 색의 고구마가 딸려 나오듯, 서사의 끝은 낯설지 않기를 바란다.

   어느 소설가는 말했다. 나는 결말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언제나 내가 쓰는 것은 절정까지고 나머지는 인물들이 쓴다. 각 인물들의 성격을 치밀하게 이미 직조해 놓았으므로 다음의 일들은 그 인물들이 알아서 이끌고 간다는 말이다. 문득, 바울의 마지막이 궁금하지 않았던 이유를 알 것 같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했던 그의 고백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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