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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든 햇살 Sep 08. 2023

그녀는 부요하다

   혼자 먹는 저녁이었다. 딸각딸각 숟가락이 그릇에 부딪히는 소리를 피하려고 텔레비전을 켰다. 몇 달 전 경찰을 사살했던 범인이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있었다. 그는 주거침입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게 방아쇠를 당겼다. 

   귀에 익은 이야기에 수저를 놓고 텔레비전 앞으로 다가갔다. 순직한 경찰, 다니엘 매카트니의 아내에게 범인의 얼굴을 보며 진술할 기회가 주어졌다. 그녀에겐 4살부터 9살까지 아들 셋이 있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 어린 아들은 아빠가 천국에서 언제 돌아오냐고, 비행기를 타고 아주 높이 날아오르면 아빠를 만나러 갈 수 있냐고 묻는다고 했다. 캐시 할머니가 기도를 부탁한 바로 그 가족이었다. 

   두어 달 전이었다. 오랜만에 372 버스에 올랐다. 버스가 레이크 시티를 지날 무렵,  이게 누구야? 누군가 등 뒤에서 큰 소리로 말하기에 고개를 돌렸다. 거기 캐시 할머니가 서 있었다. 오랫동안 궁금했던 얼굴이었다. 어깨에 멘 묵직한 가방을 내려놓으며 그녀가 내 옆에 앉았다. 한참 안부를 나누었다. 일요일마다 다운타운에서 버스를 타고 예배에 오셨는데 몇 달째 그녀를 볼 수 없었다. 당뇨가 점점 심해지고 다리도 불편해서 외출하기가 더욱 힘들다고 했다.  

   처음 그녀를 만난 건 두 해 전 5월, 주립대학 앞 대학로에 축제가 있던 날이었다. 예배당 앞 계단에 그녀가 앉아있었다. 커다란 몸체에 대조되는 작은 가방을 멨다. 함께 예배드리겠냐고 청했다. 대학생이 아닌데 괜찮아요? 저도 아닌데요. 내가 말했다. 그녀가 방긋 웃더니 천천히 일어서서 예배당 안으로 들어왔다. 찬송을 부를 때 그녀의 얼굴엔 봄 햇살 받은 복사꽃처럼 기쁨이 솟아올랐다. 

   같이 먹을래요? 그녀가 봉지를 열자 따끈따끈한 만두에서 김이 올라와 버스 안에 퍼졌다. 나누기 좋아하는 그녀는 종종 간식을 준비해 오곤 했다. 자신이 준비한 간식을 교회 식구들이 잘 먹는 날엔 아이같이 기뻐했다. 할머니는 다운타운에 산다. 자신의 아파트엔 빨래하기가 불편해서 가끔 다운타운을 빠져나와 레이크 시티에 있는 빨래방에도 들르고 친구와 외식도 하며 쉬었다 간다고 했다.

   그녀에겐 가족이 없다. 아니 가족이 있었던 적이 없다. 고아로 자랐고 포스터 패밀리에서 산 적이 있었지만, 그들이 그녀를 가족으로 받아준 것은 아니었다. 가끔 길거리에서 가게 선전물을 전달하는 일을 한다고 했다. 돈과 스마트폰이 사람들을 너무 바쁘게 만드는 것이 늘 그녀의 불만이었다. 집 주변엔 오랜 이웃들이 있지만, 그녀는 늘 혼자인 듯했다. 그래서인지 한번 이야기를 시작하면 멈추지 못했다. 나도 말 좀 하자고요. 내가 농담을 하면, 내 병이 도졌네요. 하며 수줍게 웃었다.

   그해 크리스마스이브를 절대 못 잊을 거예요. 그녀가 불쑥 말했다. 크리스마스이브는 일요일이었다. 예배를 마치고 모두 집으로 돌아가는 길,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이층까지 계단을 오를 때도 쉬어가야 하는 그녀가 눈이 쌓이는 길 위에서 조심조심 넘어지지 않으려 애쓰며 걷는 모습이 보였다. 차를 돌려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함께 가는 길, 유니온 호수와 그 뒤로 펼쳐진 다운타운의 반짝이는 빌딩 숲 위로 눈의 군무가 시작되었다. 그녀는 연신 내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집으로 돌아갈 때 어쩌나. 조심해야 돼요. 다운타운 집 근처에서 그녀를 내려주었다. 난생처음 받은 친절인 양 감격하는 그녀를 보며 함께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돌아오는 길, 마음 어디엔가 알 수 없는 따스함이 고여 출렁였다. 집으로 가까이 올수록 세상은 점점 하얗게 변해가고 있었다. 

   버스가 주립대학 캠퍼스 안으로 들어가 내려야할 시간이었다. 건강하세요. 내가 당부하자 그녀가 내 손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난 괜찮아요. 얼마 전에 총에 맞아 돌아가신 경찰관이 있는데, 어린 자녀들이 셋 있대요. 그 남은 가족을 위해서 기도해줘요. 안타까워하는 그녀의 진심어린 눈빛이 거울처럼 내 마음을 비추었다. 순간 나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내 안에 있는 무엇이 드러난 걸까? 그녀를 도와주어야 하는 대상으로 여긴 값싼 동정심이었을까? 아니면 나의 제한된 사랑이었을까? 

   외투 주머니 안에 손을 넣고 부스럭부스럭 움직이던 그녀가 작은 종이 한 장을 꺼내 내 손에 건넸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하얀 쪽지 위에 낯익은 구절이 쓰여 있었다. 그녀를 실은 버스가 떠나고 나는 캠퍼스 안으로 들어섰다. 크고 작은 나무들이 하나둘씩 내게로 다가왔다. 그 가지가지마다 알이 꽉 들어찬 포도송이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그녀는 괜찮다. 아니, 그녀는 부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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