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을 했다. 간단하게 그 질문에 맞는 답만 하면 될 텐데 상대방의 대답은 길게 늘어진다. 시간이 지나도 질문에 대한 답이 나오질 않아 답답하다. 문득 내 말이나 글에도 같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나치게 상세한 설명과 감상이 넘실대는데, 정작 던져지는 메시지는 흐릿할 때 이야기는 지루하다.
화가 지망생 제자가 있었다. 그 애의 소묘엔 선이 살아있다고 미술 교사는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했었다. 그때는 귓등으로 듣던 ‘선이 살아있다’는 말이 요즘 들어 자꾸 생각나는 건 왜일까? 구구절절한 장문을 부끄럽게 하는, 펄펄 살아 움직이는 근육질의 문장이 필요하다. 하나의 시 구절에 온종일 정신이 어지러웠던 오래전 어느 날을 기억해보면 그 문장은 마음으로 들어와 몸까지 비틀거리게 만든 예리한 날을 가졌음이 확실하다.
두어 달 구석에 어정쩡하게 서있던 카드보드였다. 큰 딸이 오늘 드디어 벽에 그 보드를 세워놓고 붓을 들었다. 윗부분을 진한 초록으로 덮더니 중간부터 갈색의 기둥을 세로로 세워갔다. 금세 높고 낮은 돌산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왼쪽 구석 돌산 위에 하얀 점 하나를 찍었다. 양이란다. 그것이 다였다. 장엄한 대자연 속에 양 한 마리가 점으로 서 있다. 경외감이 느껴지는 그림이다. 이젤 위에 올라앉은 내 그림을 힐끗 보았다. 지나치게 자세한데 그림이 뿜어내는 힘은 약하다.
오래전 작은 딸한테 완패했던 일도 떠올랐다. 튤립 축제에 다녀온 후, 그날 본 것들을 그림으로 그려보자고 제안했다. 사실에 충실한 내 그림엔 꽃들이 많아 한참 공을 들이고 있는데 3학년 작은 애가 벌써 다 그렸다며 그림을 내밀었다. 단순한 그림이 보여주는 명쾌함에 웃음이 절로 났다. 온갖 색의 꽃들은 긴 줄이 되어 가로로 누웠고 맨 위로 파랑이 한 줄이다. 바람개비를 파는 가게 앞엔 튤립 한 송이가 피었다. 아이가 그린 꽃은 단 한 송이였지만 꽃 잔치에 압도된 마음을 잘 담아냈다.
입체파 화가의 그림을 보았다. 소를 그렸다. 다음 그림엔 소의 형체를 몇 개의 도형으로 그렸다. 그다음은 서너 개의 선으로 끝났다. 마지막 그림을 본 사람들은 그 물체가 무엇인지 단서를 찾는다. 가장 적은 터치로 가장 명료하게 그 사물의 특징이나 인상을 나타내고, 물체를 알아볼 수 있는 작은 단서를 주는 친절함을 잊지 않을 때 그 솜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단순화하느냐는 쉽지 않다. 보이는 바를 그대로 묘사한다면 그것은 기계도 할 수 있는 일이다. 사람은 같은 것을 보고도 다른 마음 밭으로 각자가 해석이 다르다. 소와 도형 사이, 도형과 선 사이의 간격을 건너뛰는 데는 도약이 필요하다. 다리를 다치지 않을 정도의 도약이다. 군살을 걷어내고 근육을 키워야 한다. 추상으로 갈지, 초현실로 갈지, 인상으로 갈지, 뛰는 방향은 작가의 마음대로다. 어디로 뛰느냐? 어떻게 단순화 하느냐? 이 과정에서 작가는 자신만의 비범함을 발휘한다. 그것이 예술의 묘미다. 제각각 어디로 뛸지 모른다는 것, 그리고 모두 아름답기 원한다는 것.
소가 선이 되기 위해 근육을 키운다면 몸에 에너지가 회복될까? 중력이라는 자연법칙을 이기고 베일 듯 선이 살아날까? 매일을 단순화한다면 도약을 경험할 수 있을까? 너무 멀리 뛰어 벼랑을 잡고 겨우 기어오르기도 하고 근육도 없이 뛰었다가 넘어지기도 했다. 그렇다고 익숙한 길로만 종종 걸음을 고집한다면 결국 근육을 잃게 될 것이다.
소와 선 사이의 보이지 않는 거리엔 땀이 있다. 번득이는 영감이 언제든 찾아와도 감지할 수 있도록 레이더를 켜놓아야 한다. 그러기위해 글 쓰는 이의 삶에는 매일 들로 나가는 농부와 같이 성실이 전제된다. 땀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만큼 선의 무엇이 나를 끌어당기는가? 선의 간결함이다. 단순하나 예리한 문장은 더 깊이 생각하게 하고 더 오래 머물게 한다. 상상과 가능성을 품고 있다. 선에 날로 더욱 오묘한 매력을 느낀다. 아직 도움닫기를 하며 소를 그리기에 급급한 처지에 앞길이 아득히 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