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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errick Kim RN Nov 07. 2022

한뼘 더 성숙해 지기

그때는 유난히도 추운 겨울이었다. 나는 처음으로 환자를 돌본 지 채 한두 달이 지나지 않았고, 호흡기 질환의 계절이 오면서 병동은 가래 끓는 소리와 기침소리가 일상이 되어 있었다.


환자를 보는 것은 고사하고, 일터에 일원으로 존재하는 것조차 버거울 그때, 나에게 유달리 부담감이 컸던 밤 근무 중에 새벽 4시쯤은 여태껏 했던 일들을 정리하고 한숨 고르는 찰나의 시간이었다. 배고프면 한술 떠보려고 사물함에 넣어둔 컵라면은 봉지조차 뜯을 생각도 못했던 그때 나에게 그 10분 15분은 너무나도 소중한 시간이었다. 믹스커피 몇 개 정도를 털어 넣고 "몇 년이, 아니 단 몇 주라도 지나면 지금보다는 더 나아지겠지, 여유 있어지겠지" 이렇게 행복의 주문을 걸면서 하루하루를 넘겨가고 있었다.


하지만, 7년이 지난 지금도 난 여유 있어지지 않았다. 일에선 조금 여유 있어졌을지 몰라도 겪어왔던 여러 시간의 궤적들이 나를 짓눌렀다.


환자를 돌보는 일이나 병원에서 벌어지는 어떤 일들은 물론 늘 긴장감 위에 있지만 두려움은 조금 무뎌진 게 사실이다. 웬만한 일들은 정확하게 선 그을 순 없지만 일정한 범위 안에 잡혀가는 느낌이 드는 그 순간부터 조금씩 덤덤해져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다 보니 다른 부분에서 나에게 무게를 지우는 무언가 들이 있었다. 시간이 지나 마냥 후배이기만 했던 내가 나의 후배와 함께하고, 믿었던 관계에서 대차게 배신도 당해보고, 기만도 당해보고, 때로는 일생에 겪지 못했던 수모도 겪어가며 7년을 버티니 이제는 도망치고 싶을 정도로 고단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관계에서의 상처에 취약한 나이기에, 도무지 씻기지 않는 상처도 부단히 받고, 약간은 독기도 올라 미국에 가는 게 완전하게 결정된 그 순간부턴 "더 이상 한국에 오지 않을 것이라"는 다짐을 꾹꾹 눌러 담았다.


하지만 외국이라고 무엇이 다르겠는가... 마지막 직장에서 근무하며, 나에게 집중해서 고민해 보았더니, 나는 타인의 미성숙함을 비난하고만 있었고, 그래서 나 역시 미성숙하기 그지없었었다.


나에게 그렇게 모질게도 했던 선배들, 은근히 일은 나에게 밀어버리고 열매만 따먹는 동기들, 마음을 다해 배려해도 더 이상 필요하지 않으면 성가시다는 듯 말을 쏟아냈던 후배들, 겉으론 나에게 친절한 듯 하나 뒤에선 사람 참 우습게 만드는 동생들, 그렇게 7년간 일하면서 오만가지 인간군상들을 만났고 자책도 원망도 정말이지 수백 수천번 했지만, 여태껏 간호사로 몸담은 지난 시간들을 돌이켜 보니 문득 그들도 그들의 입장이 있었으리라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선배도 너무나 바쁜데 옆에서 그러고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모질게 했었을 것이고, 성공하고 싶으니 쉽게 넘어갈만한 사람 정도 잡아 넘는 건 어떨 땐 나도 그러려고 하지 않았던가... 나는 배려라고 했지만 상대는 원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그래서 나에겐 상처되는 말이지만 상대에겐 단호한 표현일 수도 있겠고, 다른 한편으론 그렇게도 나에게 호의적이지 않으면서 앞에서 좋게 대해느라 얼마나 노력했을지 생각하면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대단하다는 생각도 든다.


나는 아직도 여유 있어지지 않았다. 적어도 켜켜이 시간이 쌓이면서 고민은 깊어지고 상처는 더 많다. 하지만 여러 가지 일들을 겪으며 아주 조금은 다른 사람의 상황에서 고민해 볼 여유는 생긴 것 같다. 사람을 돌보는 직업이기에 나는 누군가가 나에게 여태껏 간호사로 일하면서 얻은 가장 큰 자산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이것이라 대답할 것이다.


워낙에 감정적이고 급한 성격 탓에 우여곡절도 많이 겪었지만, 다른 사람의 모습을 비난하는 사이에 다른 사람의 감정은 존중해주지 못했고, 다른 사람의 여유를 이해해 주지도 못했었던 것 같다. 늘 머리로는 이해한다고 했지만 마음으로 공감하진 못했고, 말로만 간호사라 해도 간호를 하긴 했었나 싶기도 하다. 나는 늘 그렇게 다른 사람들의 부족함을 탓하느라 나의 부족함을 보지 못하진 않았을까? 내가 새로운 환경에서 다시 간호를 시작하게 되면 나는 어떤 간호사로 그들 곁에 함께할 것인가? 마지막 직장에서 고민이 깊어진다.


날씨가 부쩍 쌀쌀해지는 요즘, 다시 나의 처음 간호사 시절로 돌아가서 힘들었던 순간 동안 나에게 남았던 강렬한 기억이 낯선 환경에서 새로 시작할 나에게 질문을 던져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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