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카고로 오는 비행기, 비행기 안에서 약간의 우여곡절이 있어서 한국을 떠나 동요한 내 마음은 불행인지 다행인지 정리가 된 채로 비행기에서 내렸다.
미국에 처음 오자마자 누구든지 처음으로 해야 하는 입국 수속을 위해 긴 줄의 대열에 합류했다. 한 손에 서류 꾸러미를 들고 한참을 기다리면서 어렴풋이 보이는 다른 사람들의 입국 수속, 저마다 각자의 미국 방문 이유를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고 긴 대열은 점차 시간이 지나자 줄어들어 어느덧 내 차례가 다가왔다. 서류를 확인하고 사진과 얼굴을 대조하며 간단한 인터뷰를 한 후에 생각보다 입국 수속은 금방 끝났고, 입국 심사대를 빠져나오자 비행기가 착륙한 순간보다 더 피부에 와닿게 미국에 도착한 느낌이 물씬 들었다. 짐을 다시 부치고 환승을 위해 이동하면서 내심 "오! 순조로운 출발이다!" 들떠서 미국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땐 앞으로는 이와 같이 한 번만에 될 일은 없을 거라는 사실을 몰랐었다.
이곳에서 경제생활을 하려면 반드시 첫 관문으로 우리의 주민등록번호와 같진 않으나 유사한 기능을 하곤 하는 사회보장번호 (Social Security Number, SSN)* 를 신청하여 받아야 한다. 그야말로 미국 정착의 알파이자 오메가. 반드시 간단한 서류를 지참하고 직접 대면으로 신청해야 하기에 방문가능한 주변의 센터를 조회하고 필요한 서류를 가져가야 하는데, 이 드넓은 땅에서 자가용 없이 일련의 일을 수행하려면 방문 전에 치밀한 계획이 필요했다. 사전에 전화를 해서 긴 통화연결시간을 거쳐 현재 가진 서류로 신청이 가능함을 확인하고 우버를 불러 방문을 하였지만, 돌아온 대답은 서류가 불충분하다는 것.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아 내가 가진 서류와 신청 안내문을 뽐내듯 펼쳐서 한 자락씩 짚어가며 설득했으나, 돌아온 대답은 "우리는 이렇게 해본 적이 없기에 서류로 진행할 수 없다"는 답변뿐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요구하는 서류는 이민자로 온 내가 득할 수 있는 서류가 아니었고 몇 차례 어필을 해도 돌아오는 대답은 같았다. 순간 답답한 마음에 돌아오는 길에서도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다행히도 다른 센터까지 조금 멀리 이동해서 전날과 같은 서류로 사회보장번호를 받을 수 있었다.
은행에서 계좌를 열어야 한국에서 가지고 있는 돈을 끌어 쓸 수 있으므로 은행에 전화 후 방문하였다. 하지만 이곳에 살고 있는 주소지, 내 이름으로 된 우편물 2개를 가지고 와야 계좌 개설이 된다 하여 한번 더 은행에서 쓴맛을 보게 되었다. "한국의 돈을 끌어오지 못하면 집을 얻지 못하고, 집을 얻지 못하면 주소 증빙이 안되고, 계좌를 못 열어서 한국의 돈을 끌어오지 못하고.." 다시 돌아오는 길에 답도안 나오는 생각에 굴레에 빠졌다. 현금으로 들고 온 약간의 돈을 만지작거리며 이거 어떡하지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하지만 역시 다행히도 다음날 다른 은행에 방문하여 전날과 같은 서류로 은행 계좌를 열 수 있었다.
이쯤 되니 도착 일주일 만에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한 번만에 될 거라는 욕심을 버리고 내려놓자"
물론 이후에 해야 하는 일도 한 번만에 된 게 단 하나도 없었다. 이 넓은 미국에서 우버비를 뿌려가며 어렵사리 뭔가 시도해도 한 번만에 안되니 그때마다 맥 빠지기는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사람일 마음먹기 달렸다고 "그래 어차피 한 번에 안 해줄 줄 알았지" 생각하니까 지갑은 얇아져갔지만 마음은 그렇게 심란하지 않았다. 집 렌트도, 차도, 직장에서 일하기 위해 필요한 범죄기록 조회 지문채취도, 운전면허도 어느 것 하나 깔끔하게 풀려나간 것이 없었지만, 직접 부딪쳐 가며 온탕과 냉탕을 왔다 갔다 하니 신기하게도 마음은 점차 안정을 찾아갔다.
당연하게 느끼고 있었던 편리함, 나만의 상식은 도착한 지 한 달이 넘어서 완전히 비틀어졌다. 하지만 나는 그걸 힘든 역경이라 여기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이들이 오랜 시간 공들여 만들어 놓은 사회에 이방인으로 들어온 내가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는 것들의 일부이리라 이렇게 마음먹기로 했다.
거리도 멀고, 문화도 다르고, 정서까지 너무 다른 타국에서 자리를 잡는 게 매끄럽게 풀려나가진 않았다. 서류 한 장 때문에 발길을 돌리기도 하고, 때로는 내가 원칙상 맞는데도 상대방이 불충분하다고 생각해서 접수조차 받아주지 않으면 어찌할 도리가 없기도 했다. 이렇게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어가며 새로운 문화와 사회 속에서 나의 원칙과 예상대로만 흘러갈 거라 지레 짐작했던 나의 미숙함이 나를 더 힘들게 하지 않았나 느끼기 까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이후에는 편안한 마음으로 "그래! 어디 또 새로운 거 한번 들어와라!" 하는 심정으로 여기저기 다니다 보니 시간이 지나 지금 와서 보면 그때 해야 했던 것들은 이 빠진 것 없이 다 해결되긴 했다. 이렇게 육탄전으로 시작한 미국 초기 토대의 틀이 잡혀나가고 있었다.
아직도 내가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꽤나있지만, 내가 어찌할 수 없는 현상을 받아들이며 극복해 나가기로 했다. 마치 뜻하지 않은 역경을 겪어 나가야 하는 것처럼.
뭔가 생각했던 대로 일이 풀리지 않으면 "아, 좀 더 알아보고 올걸" "내가 좀 꼼꼼하게 해올걸" 하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지금까지의 일들을 쭉 펼쳐놓고 보면 내가 어찌했다고 풀릴 문제는 아니었던 듯싶다. 그렇기에 거절과 뜻하지 않은 결과에 순간순간 실망하지 않기로 했고, 지금은 온 지 얼마 되진 않았으나 "그럴 수 있다. 시간 지나면 다 해결된다" 생각하곤 한다. 그리고 생각보다 그렇게 해서 문제가 해결되면 그 성취감이 배가되어 결과물이 손에 떨어질 때마다 다른 사람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할 순 있어도 나의 자신감을 조금씩 키워주는 것 같기도 했다.
* SSN (Social Security Number): 개인이 받는 급여를 정부에 보고하여 Social Security(사회보장) 연금의 수급 자격을 결정하는 데 사용. 미국에서 일하고, Social Security(사회보장) 연금을 받고, 기타 정부 서비스를 받으려면 SSN이 필요하다. [출처: 미국 사회보장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