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Derrick Kim RN Oct 11. 2023

무엇을 위해 간호를 하는가?

신규 딱지를 막 뗐을 무렵, 우리 모두에게 두려운 선배가 있었다. 단지 성격이 겁나서 그렇다기보다는 디테일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빈틈없이 일하는 선배의 능력은 곧 병동에서 권력이었다. 그런 선배에게 몇 번 호되게 혼난 적이 있었는데, 그 가르침이 아직도 내 간호사 생활의 밑천이 됨은 지금생각해 보면 참 감사한 일이다. 그때 선배가 한 말이 있는데,


"너는 환자를 너 일감으로만 보는 것 같아. 너는 사람을 간호하러 왔니 아니면 일감을 쳐내러 왔니?"


그 이후 지금까지 간혹 시간에 쫓겨 허둥대다 보면 저 말이 문득 뇌리를 스쳐 나도 모르게 템포를 낮추고 환자를 다시 돌아보곤 했다.


며칠 전 나이트 근무 중에 환자 전동을 하던 와중, 데이 근무자가 올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고, 상대 병동에도 이미 인수인계까지 해 놓은 상황에서 마음이 급했다. 내 번근무에서 벌어진 일은 온전히 마무리하고 다음번에 깔끔하게 인계를 줘야 한다는 강박에 손은 바빠지고 나도 모르게 조금씩 환자를 채근하고 있었다. 환자는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었는데, 나를 부르고 손을 덥석 쥐더니


"나 지금 너무 무서워. 나 더 이상 위험해지고 싶지 않아. 나 죽고 싶지 않아."


그 말을 듣자마자 마치 머리를 한 대 맞은 듯이 멍해지고 온몸에 힘이 풀렸다. "아, 나는 아직 한참 멀었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 환자를 안정시키고 다음 근무자에게 양해를 구한 다음에 천천히 환자가 원하는 페이스에 맞춰 전동을 마무리했다. 다행히도 몇 마디의 대화가 오고 가니, 환자의 기분은 어느 정도 누그러져 흥분을 가라앉힐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나를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여태껏 습득한 간호지식, 테크닉에 불과한 것들에 도취되어 "사람"을 간호하고 있다는 사실을 순간순간 잊고 있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신규 때는 연차가 쌓이면 환자간호가 훨씬 수월해질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간호가 테크닉뿐이라고 생각했던 그때의 착각이었을 뿐, 환자간호는 하면 할수록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다. 조금 더 신경 쓰면 또 다른 디테일이 보이고, 그 디테일을 짚어 나가다 보면 끝끝내 인격체로서의 환자가 보인다. 그러면 잠시나마 교만했던 마음이 내려놓아지고 다시 겸손해진다.


여태껏 환자와 보호자로부터 수많은 짜증도 받아보고, 불합리한 요구도 많이 당해봤지만 내가 실제로 입원도 해보고 시간이 지나 환자의 입장이 되어 보니, 그분들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겠구나 절로 이해가 되었다. 나는 간호사로서 내 손을 스쳐간 환자들 중에 한 명으로 그들을 대할 뿐이지만, 그 한 사람 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지금이 일생일대의 고비일 수도 있고, 여태껏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차원의 도전을 겪어나가고 있을 수도 있겠지 싶으니 이해 못 할 상황은 그리 많지 않았다. 다행히 미국의 환자들은 간호사를 의료인으로 존중해 주는 분위기가 있어 여태껏 경험한 그런 정도의 요구나 감정소모는 겪지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그렇게 나를 신뢰하기에 더 책임감에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도 사실이다.


한 번씩 "어, 이제 일이 익숙해지네, " 싶으면 어김없이 나를 겸손하게 만드는 일이 찾아와 한 번씩 경고를 준다. "너 자만하지 마, 너 아직 배울 거 많다!' 그러면 다시 화려한 테크닉에 가려진 본질을 고민하고 호되게 혼나던 그때로 돌아가서 겸허하게 근무해야 했다. 그래야만 적어도 부끄럽진 않을 것이기 때문에.


나도 사람인지라 가끔 본질을 잊고 산다. 그래서 가끔씩 이런 일이 찾아올 때 내가 도대체 무엇을 목적으로 일을 하고 있는지, 내가 오늘의 근무로 달성해야 할 목표는 뭔지 생각하면 생각이 조금은 명확해진다. 퇴근길에 마지막 투약을 마무리하고 부러 그 환자에게 들러 "나에게 귀중한 것을 알려줘서 고맙다"라고 다시 한번 인사를 전했다.



작가의 이전글 오늘의 밤은 어제의 낮보다 아름답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