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칭 '조기유학 1세대'
1993년 출간 후 베스트 설러였던 홍정욱 씨의 미국 유학 내용을 담은 <7막 8장>이 많은 학생들의 가슴에 조기유학에 대한 '환상의 불씨'를 짚혔고, 이후 미국 조기유학 붐으로 연결되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필자도 미국에서 고등학교 2학년 재학 중 (미국 학제로 11학년) 아버지께서 친히 이 책을 공수해 주신 덕에 몇 번을 읽고 또 읽었던 기억이 있다. 부친 나름의 ‘선견지명’ 덕에 1991년 갑자기 미국 유학이란 걸 떠나게 되었고, 다행히 국제결혼을 하셨던 고모님이 미국에 있었기에 보통의 유학생들과 달리 (사립학교를 선택하지 않고) 전형적인 미 중부의 한 지방도시에 위치한 공립학교에서 유학을 시작했다.
고등학교 3년의 시간을 보낸 후 대도시 소재의 대학교로 진학, 한국에서 온 유학생들을 많이 만난 후 판단한 바로는 비슷한 나이의 친구들 중 필자처럼 1990년대 초반에 해외로 유학 와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경우는 많지 않았다. 개중 캐나다, 남미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친구들이 몇 있었고, 소수지만 해외근무나 사업을 하는 부모님을 따라 해외생활을 시작해서 그 나라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대학으로 진학한 경우가 있었다.
한국 학생들이라고 하면 대부분이 교포학생들이었고, 순수 한국에서 온 '유학생'이라고 하면 한 학년에 몇 명씩 밖에 없던 때였으니 나름 '조기유학 1세대'라고 하여도 크게 무리는 아니지 싶다. 참고로 홍정욱 씨의 미국 유학이 85년도였다고 하고, 나중에 알게 된 바로는 70년대에도 '국비장학생'으로 대학원으로 유학 온 선배들이 있었으니 그때가 진정한 '유학 1세대'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때는 조기유학이 보편적이지 않았을 시기니, 90년도부터를 '조기유학 1세대'라고 봐도 무방할 듯하다. 조기유학이 아닌 유형으로는 고등학교 졸업 후 여름방학 등을 이용해 단기로 어학연수를 와서 대학교 과정으로 편입하던지, 대학원이나 박사과정으로 유학을 나오는 것이 대부분이던 시기였다.
고등학교 3년 동안 물론 힘든 일도 있었을 테고, '사립학교를 갔었더라면 어땠을까' 등 의 후회도 있지만, 그렇다고 기억에 남을 만큼 큰 어려움은 없었다. 다행히 크게 반항적이거나 비관적인 성향도 아니었고, 자기 통제 (discipline) 능력이 모자라서 담배, 마약 등의 유혹에 빠지거나, 학생기록부에 기록될만한 행동을 할 배짱도 없었기에 무난하게 졸업했다. 대학에 진학해서는 지금은 많은 학생들이 선택하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동경으로 휴학 후 배낭여행이나 교환학생 프로그램 같은 것도 시도하지 않았기에 유급 없이 학부과정과 대학원을 무난히 마쳤고, 그렇게 10년의 유학생활을 끝으로 귀국길에 올랐다.
이때 귀국을 고려하고 있던 필자에게, 대부분의 지인들은 ‘왜 한국으로 돌아가려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물론 다른 방법으로 영주권을 취득할 기회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간략하게 얘기하면 갓 학업을 마친 26살 남성에게 결혼을 하고 싶은 생각이 들만한 배우자를 만날 수 있는 확률은 높지 않다). 나름 첨단공학으로 분류되는 전공으로 학위를 취득했지만, 방산산업에서 수요가 있는 필자의 전공을 살려 취직하고자 하면 영주권이 없는 유학생은 최소 박사학위가 있어야 그나마 취직이 가능했고, 여름방학을 이용해 두어 번 한국을 방문했을 때마다 누리던 그 '짜릿한 삶'을 잊을 수 없어 한국기업에서 입사제의를 받자마자 바로 귀국을 결정해 버렸다. 아주 근시안적인 판단이었음을 뼈저리게 인정하고 있다.
그나마 첫 직장은 전공을 살려 한국에서 몇 안 되는 항공분야 방위산업체에 입사했고, 입사 동기 중 유일한 유학파였기에 '어학특기'라는 꼬리표가 항상 붙어 다녔고, 긴 미국 생활로 '유학생과 교포 사이의 어정쩡한 버터 냄새'도 적당히 풍겼지만, 엄격한 부친의 영향과 대학생활 중 한국학생회에서 활동한 시간이 많았기 때문에 다소 수직적인 의사소통이나 조직문화가 크게 거부감이 들지 않았기에 사내에서 어딜 가든 관심을 받았다. 업의 특성상 많은 미국인 엔지니어들이 사내에 파견되어 있었고, 한국 엔지니어들의 해외 출장도 많았다. 그 덕에 입사 첫해부터 (보통은 대리를 달기 전에 해외출장에 끼기가 쉽지는 않다) 중요한 출장에 포함되어 해외로 돌았고 해외 귀빈의 의전업무에 자주 착출 되었다. 입사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대부분의 기업체 연구소가 지방에 있었기에 서울 번호판을 단 무늬만 '스포츠카'를 타고 다니는 유일한 직원이었으니 눈에 안 띌 수가 없었으리라!) 연구소장 비서와 소개팅을 해주겠다고 임원들에게 연락이 오기도 했었다.
물론 <7막 8장>의 영향으로 아주 잠깐 하버드를 갈 수 있을까 고민을 해봤고 결과적으로 저자는 그럴 깜은 되지 못했지만, 필자가 대학교에 지원을 할 때를 기억해 보면 대부분의 유학생들은 조금만 노력하면 아이비리그나 유명 주립대학에 입학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사립대학에서는 장학금이나 학비지원을 해줄 필요가 없는 유학생들은 좋은 비즈니스 대상이었고, 저자를 포함한 대부분의 유학생들이 약 10개 정도의 학교에 지원하면 대부분 5 ~ 6개의 입학통지서 (admission letter)를 받는 건 그렇게 특이한 경우가 아니었다. 시기적으로 운발만 맞는다면 본인의 실력보다 훨씬 좋은 학교에도 갈 수 있으니 '우선 지원해라'는 말도 많이 들었던 시기였다. 예를 들어 특정 대학교에서 신축건물을 세우기 위해라던지의 이유로 재정을 늘리려고 하는 시기라면 학교 입장에서 해외 유학생이 자비로 들고 오는 학비와 생활비는 상당히 매력적인 자원이었다. 필자의 친구 중 성적이 저자보다 좋지 않았던 녀석도 운 좋게 스탠퍼드대의 입학허가를 받아버리기도 했다.
그때와 비교하자면 지금의 조기유학과 이후의 취업시장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훨. 씬. 어렵다. 주위에서 꽤 자주 조기유학 관련해서나 미국 대학에 지원하려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문의를 많이 받고 있고, 아는 만큼 조언을 아끼지 않고 해준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에서도 준비만 좀 잘하면 (아이비리그까지는 아니더라도) 유명 주립학교에 입학하는 것은 어렵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판이 완전히 바꿨다. 미국 내에도 사립학교, 과기고 (science & technology school ) 등의 특목고가 많이 생겨남과 동시에, 공교육에도 부모의 빈부의 격차에 따라 철저히 자본주의의 영향을 받은 '교육의 질'에 엄청난 차이가 발생할 수밖에 없고, 사교육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또한 이제는 한국뿐만이 아닌 전 세계에서 날고 긴다는 학생들과 경쟁을 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한국만 하더라도 고등학교에서 직접 유학반을 운영하는 학교가 생겼고, 특목고, 외고, 자사고, 그리고 이미 초등학교 중학교 때 한국을 떠나서 전 세계에 포진되어 있는 조기유학생들이 대부분 훌륭한 영어실력과 비슷비슷한 포트폴리오를 가지고 유명대학들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한국만 그렇다고 생각되는가? 중국, 인도, 중동국가의 교육열도 한국과 비교해서 전혀 뒤처지지 않고, 개발도상국의 많은 부유층의 자녀들 또한 영어권 대학으로 몰리고 있다. 필자가 일하면서 거쳐온 호주와 싱가포르의 유명 사립학교들은 이미 중국 학생들이 먹여 살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대중에게 잘 알려진 미국 대학교의 입학 경쟁률은 50 대, 100 대 1을 우습게 넘기 시작했다.
주위에 미국 교포지만 한국에서 살고 있는 분들과도 교류가 많은데, 그 자녀들 조차도 미국 대학에 진학할 때 부모님이 사는 주 소재의 (부모가 세금을 내고 주민으로 인정되는 주의 주립학교에서는 자녀들에게 가산점이 붙고 학비도 현저하게 싸다) 주립학교에서도 입학허가를 못 받는 경우를 종종 본다. 그 주립학교들이 우리가 대부분 알고 있는 유명학교였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절대 밀리는 성적도 아니었고 오히려 졸업한 외국인학교에서는 상위권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높은 acceptance rate의 벽을 넘지는 못했다. 이게 지금 외국대학 입학을 꿈꾸고 있는 유학생들의 현실이다.
조금만 시야를 넓혀 들여다보면, 대다수의 유학생들이 결정하는 ('다수가 택하는 길'이라 칭하자) 방법이 아닌 다양한 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부모와 학생들은 또 비슷비슷한 준비를 하며, 본인들의 재정상태를 고려하지 않거나, 자녀의 장점과 성향을 파악하지 못한 채 그 ‘다수의 길’을 선택하고 있다.
필자는 확실하게 말해줄 수 있다. 그 다수가 선택하는 길을 똑같이 따라 선택한다면, 운이 진짜로 좋아 유학 후 국내 대기업에 (또는 운 좋은 소수는 현지에) 취업이 가능할 수도 있다. 그리고 몇 년 그렇게 비슷비슷한 다수와 일을 하다가 보면 누구에게 맡겨도 해낼 수 있는 ‘고만고만한 일만 해낼 수 있는 인력’으로 하향편준화가 되던지, 직업에 만족하지 못해 저자와 같이 퇴직과 이직을 계속하는 커리어를 보내야 할 수 있다. 그렇게 해서라도 본인의 적성을 찾는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도 않다면 20년 정도의 직장생활을 거친 후 언제든지 ‘명퇴’를 당하게 될지 모르는 불안감에 싸여있는 직장인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때 가서야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라는 말을 외치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