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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동찬 Sep 11. 2022

88년 용띠 K-장녀

1. 장녀로 태어남 당했다.


"딸이네요."


중년의 남성 산부인과 의사는 초음파를 확인한 뒤, 검진을 위해 누워 있던 엄마를 돌아보며 무심하게 말했다고 한다.


"낳으실 거예요?"


엄마가 무어라 답을 하기도 전에, 의사는 제가 한 질문에 스스로 답을 내렸다.


"첫째라고 그랬죠? 그럼 여자애라도 낳아도 괜찮아."


초음파 확인을 위해 배에 젤을 잔뜩 바른 엄마에게 티슈를 건네며, 의사는 이렇게 덧붙였다고 했다.


"둘째부터는 고민 좀 해봐야지."






의사의 말이 어떻든, 엄마는 내가 건강하다는 게 기뻤다고 한다. 성별은 상관하지 않았다.

집에 돌아온 엄마는 아빠가 퇴근하기를 기다렸고, 아빠가 집에 돌아오자 함께 모시고 살던 시부모에게 아이의 성별을 알렸다.


"딸이래요."

"딸?!"


할머니는 앙칼진 목소리로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그럴 리가!"

"오늘 의사가 초음파 보고 알려줬어요. 딸이래요."

"네가 뭘 잘못 안 거겠지. 배가 딱 아들 배인데 무슨 소리야!"

"아뇨, 확실히 딸이라고 했어요."

"아냐, 낳아보기 전까지는 모른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내가 딸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다. 엄마는 아빠가 내심 편을 들어주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아빠 또한 "아들이 좋기는 한데... 딸이면 둘째 아들 낳으면 되지." 하고 허허 웃기만 했다고 한다.


그 뒤로 엄마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끊임없는 '아들 라이팅'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렇게 하면 뱃속의 아이가 딸에서 아들로 바뀌기라도 할 것처럼, 할머니는 엄마 배를 만지며 "우리 장손."이라고 연신 주문을 외웠고, "고추 하나 떡 달고 나와. 알겠지?" 하고 압박 아닌 압박을 주었다고 한다.


엄마는 개월 수에 비해 배가 작게 나오는 편이었는데,  때문에 만삭 때에도 동네 사람들이 임신 6-7개월 정도로 알았을 정도라고 한다. 엄마가 출산을 마치고 혼자 장을 보러 나왔을 때는 유산을   알고 동네 사람들이 다들 걱정을 했다고 하니 말이다.


그런데도 할머니는 엄마의 배가 너부데데하며 옆구리까지 뒤룩뒤룩 살이 쪄서 큰 걸 보니 아들이 분명하다고 큰소리를 쳐댔다. 엄마가 할아버지와 아빠의 몫으로 산더미처럼 구운 갈비에 어쩌다 한 번 젓가락을 대면 할머니는 그때를 놓치지 않고 "고기에 걸신이 들린 것 같으니 아들이 확실하다."라고 말했다.


엄마가 임신 기간 내내 아무리 딸이라고 말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할머니는 뱃속의 아이가 딸이라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역정을 냈고, 엄마를 힐난했고, 네가 임신이 처음이라 아무것도 모르는 거라며 무안하게 만들었다.


아빠는 할머니가 그럴 동안 늘 그렇듯이 허허 웃기만 할 뿐, 아무런 말이 없었다.

신혼 방에 둘이 남아 엄마가 서운함을 토로하면, 아빠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노인네들이 아들 원하시니까 그렇지. 그리고 어머니 말대로 낳기 전까지는 진짜 모르는 거잖아." 하고 넘겨버렸다.


엄마는 내가 태어날 때까지 홀로 외로운 싸움을 이어가야만 했다. 엄마는 대응책으로 밖에 나가 사람을 만나는 족족 뱃속 아이가 딸이라는 걸 강조했고, 할머니는 그 사실을 알 때마다 낳기도 전에 그런 소리를 해서 부정을 타게 만드냐며 엄마를 무섭게 몰아붙였다. 마치 네 말대로 아들이 아니라 딸이 태어나면 그 '잘못'이 모두 엄마인 너에게 있다는 듯이.






엄마는 할머니 입장에서 그리 호락호락한 며느리가 아니었다.


그 시절 서울에서 가장 유명한 명문여고를 졸업한 엄마는 좋은 대학으로 진학해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을 하고 영양사 자격증을 따서 대한민국에서 제일 유명한 제약회사 중 하나에 입사해 영양사로 일을 했다.

할머니는 그런 엄마를 결혼하자마자 집안에 꿇어앉혔다. 시부모를 모셔야 하고, 남편의 뒷바라지를 해야 하니 전업주부로 전향하라는 것이었다.

엄마는 일을 더 하고 싶었지만, 60년대생에다 나와 마찬가지로 K-장녀로 태어난 엄마는 그 말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할머니는 엄마가 잘난 척이 심하며, 어른을 공경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래서 엄마가 무슨 말이라도 할라치면 밑도 끝도 없이 '못 배운' 시부모라고 무시하냐며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곤 했다. 단지 음식을 하기 전에는 손을 닦는 것이 위생에 좋다고 했을 뿐인데.


할머니와 엄마는 뱃속 아이가 딸이냐, 아들이냐로 몇 달째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할머니는 엄마가 순순히 시어머니 말을 듣지 않는 것이 못마땅했고, 엄마는 시모가 죽어도 자기 아이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싫었다.


할머니는 결국 최후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주말에 아빠를 끌고서 아직 태어나지 않은 나의 사주를 보러 간 것이다. 태어나지 않은 사람의 사주를 어떻게 보냐고? 출산 예정일을 중심으로 그 앞뒤 일주일 간의 전체적인 사주를 본다더라.


어쨌든 할머니는 이제 신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용하다는 무당을 찾아갔다.

무당은 할머니와 아빠가 자리에 앉자마자 "손주 궁금해서 왔구나?"라고 말을 해서 더욱 신뢰도를 높였다. 할머니는 기다렸다는 듯이 첫째 며느리가 임신 중인데 뱃속의 아이가 척 봐도 아들인 것을 딸이라고 벅벅 우긴다며 볼멘소리를 토해냈다.


할머니 한탄을 묵묵하게 들어준 무당은 태어나지 않은 이의 사주는 사실 그리 정확하지는 않으니, 아이가 태어나면 다시 사주를 보러 오라고 하며 대신 신점을 쳐주겠다고 방울을 흔들어댔다.


무당은 자신이 모시는 신께서 아주 선명한 그림을 보여주셨다고 하며, '첫째 며느리가 가진 첫 손주'가 아주 대단한 운명을 타고났다며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쏟아내기 시작했다고 한다.

무당의 말에 의하면, 나는 크면 "별"을 달게 될 아이였다. 그것도 아주 많고 번쩍번쩍한 별을.


별? 할머니와 아빠는 그 말에 눈이 반짝거렸다. 모자는 그것을 아이가 '장군감'이라는 뜻으로 해석했다. 내가 군인이 되어 쓰리 스타, 포 스타 장성이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무당 집을 나오며 할머니는 아주 만족스러워했다.

뱃속 아이가 장군이 된다니, 그건 빼도 박도 못하고 아이가 아들이라는 뜻이라며 좋아서 펄쩍펄쩍 뛰었다. 아빠도 마찬가지로 좋아서 입이 헤벌쭉해졌다.


뒤늦게 아빠한테서 들은 말이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무당은 끝까지 뱃속 아이가 '아들'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저 태어날 아이가 아주 좋은 사주에 운명을 타고 날 거라는 말 뿐이었다고.


나는 그것이 무당의 술수라고 생각한다.

딱 봐도 뱃속 아이가 딸이면 낙태를 종용할 시어미에, 그 어미 뒤를 쭐레쭐레 쫓아온 속없는 아들놈.

무당이 내가 딸이라는 걸 정말로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뱃속 아이를 살리기 위해 나름의 술수를 썼다는 것은 자명했다.


내가 태어난 뒤, 할머니는 무당 말에 속아 딸을 낳았다며 가슴을 치더니 이제 막 아이를 낳아 눈도 제대로 못 뜨는 엄마에게 "둘째는 꼭 아들 낳아야 한다." 고 냉랭하게 말했고, 할아버지는 막 태어난 나를 보지도 않고 한숨을 푹 내쉬며 밖으로 나가버렸다. 아빠는 실망스러운 얼굴로 "수고했다."라고 한 마디만 할 뿐이었고.


하지만 할머니의 생각과는 달리 그 무당은 정말 용했다. 지금도 점을 보고 있다면 나도 한번 더 보러 가고 싶을 정도로.


무당이 보았다는 나의 운명에 그 무수히 많다는 "별".

그것은 할머니와 아빠가 기대한 대로 내가 군인이 되어 "스타"를 달 운명이라는 뜻이 아니었다.

그로부터 25년 뒤, 그 말을 듣고 태어난 나는 웹소설 작가가 되어 서른 중반이 되어가는 지금까지 독자들에게 무수히 많은 "별점"을 받고 있으니까.


물론 그 별이 그 별일 줄은, 휴대폰도 없던 시절에 무당도 절대 알지 못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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