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내게 주어진 삶
나는 애교가 많은 편이었다.
어른들 앞에서 춤도 잘 추었었고, 노래도 잘 불렀었고, 어리광도 잘 부렸었다. 말 그대로 보고만 있어도 웃음이 나오게 만드는 '애굣덩어리'였었다.
하지만 이 모든 건 과거형일 뿐이다.
앨범을 들여다보면 유년 시절의 나는 항상 장난기 넘치는 얼굴을 하고 있다. 혀를 내밀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렌즈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고, 까불다가 의자에 깔려 다친 손가락을 자랑스럽게 내밀며 둘리 흉내를 내고 있다. 그러나 그런 나를 뒤에서 쳐다보고 있는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얼굴은 다소 어둡기만 하다. 딱딱하게 굳어 있고, 웃음기도 하나 없다.
이런 말을 하면 믿기 힘들겠지만, 의외로 할머니는 나를 꽤 아꼈다. 태어나기 전부터 그렇게 엄마를 못 살게 굴며, 뱃속의 나를 마뜩잖게 생각했던 걸 떠올리면 다소 매치가 되지 않지만 어쨌든 할머니는 당신 나름의 방식으로 나를 아꼈다.
할머니에게는 천만다행으로 나는 아빠를 많이 닮은 얼굴로 태어났다. 아빠를 닮아 눈이 외까풀에 얼굴이 둥그랬고, 머리카락은 심한 곱슬에 고집이 셌다.
아빠는 3남 2녀의 넷째로, 할머니가 낳은 자식 중엔 첫아들이었다. 그 말인즉슨, 아빠 위로 누나가 셋이나 있다는 뜻이다. 막내 또한 아들로 태어났으니 노인네들의 아들 사랑이 좀 분산되지 않았을까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마는, 그게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한국의 가부장 사회란 그리 호락호락한 게 아니다.
아빠는 장남이었고, 아빠의 동생은 그냥 고추 달고 태어난 막내일 뿐이었다. 으레 그렇듯이 집안의 모든 관심과 애정, 그리고 지원은 모두 장남에게 쏠렸다.
이걸 불행이라고 해야 할지,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아빠는 어릴 때부터 머리가 좋았다. 동네에서도 유독 총명하다는 소리를 듣는 자랑스러운 아들이었다. 말도 청산유수처럼 잘했고, 책도 아주 많이 읽었다. 또 손재주도 좋아서 동네를 돌아다니며 모은 나뭇가지로 뚝딱뚝딱 그럴싸한 비행기를 만들어 가지고 놀기도 했다.
동네 사람들은 아빠를 보며 장 가네 장남은 커서 크게 될 것이 분명하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그럴 때마다 할머니의 어깨는 으쓱해졌다. 자연스레 아빠를 향한 기대도 높아져만 갔다.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그것은 이 가족에게는 커다란 비극의 씨앗이 되었다.
나는 아빠를 많이 닮은 덕에 할머니의 사랑을 얻어낼 수가 있었다.
나는 엄마가 낑낑대며 이고 지고 사온 동화책 전집을 보고 스스로 한글을 뗐다. 엄마 말에 의하면 돌 무렵에는 이미 혼자서 책을 읽을 줄 알았다고 한다.
나는 어릴 때부터 책을 무척 좋아했다. 일어나자마자 하는 일은 눈을 비비고 앉아 머리맡 책장에서 제일 좋아하는 디즈니 책을 꺼내 읽는 것이었다. 할머니는 나의 그러한 점을 마음에 들어 했다. 내가 아빠를 닮아 무척 똑똑하다고 치켜세우며 나를 아주 어여삐 여겼다.
아이에게 끝도 없이 너는 똑똑하다고 말하고, 커서 큰 인물이 될 거라고 도닥여주는 건 칭찬이지만 칭찬이 아니다. 아이는 자신의 타고난 재능과 능력을 너무 과신하게 되고, 그것에 과할 정도로 기대게 된다. 조금이라도 어렵거나 풀기 힘든 문제에 당면하면 금세 포기해버리고 온갖 변명을 갖다 붙이며 문제 자체를 폄하하고 무시하기에 이른다. 내가 그 과제를 해내지 못한 건, 과제가 이상한 것이지 나의 능력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렇게 아이는 점점 실패와 도전을 두려워하다 못해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 가고, 제자리에 멈춘 채로 일말의 가능성에만 매달리게 된다. "내가 안 해서 그렇지, 하면 잘해." "내가 맘먹고 시작만 하면 그 판에 있는 사람들 다 제치고도 남아." 하고 허풍을 치는 것처럼.
이른바 '가능성이 있는 상태'에 영원히 머물고 싶어 하는 것이다. 마치 긁지 않은 복권을 한 장 들고서 이 복권이 1등이 확실하다고 큰 소리를 치며 거들먹대는 것과 같다. 그러나 복권은 절대로 긁지 않는다. 1등일지도 모를 가능성만 은박 밑에 가려둔 채.
그리고 나의 아빠가 바로 그런 긁지 않은 1등 복권 같은 사람이었다.
장 씨 가문 장남의 장녀로 태어난 나는, 내가 기억하는 아주 어릴 때부터 모순 속에 갇혀 살았다.
나는 딸답게 애교도 많이 부리고, 귀엽고, 사랑스러워야 했다. 타고나길 사람에 대한 애정이 깊게 태어난 나에게 그 롤은 사실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목소리가 컸고, 말이 많았으며, 친구들과 놀 때는 항상 놀이를 주도했다. 나는 인형 놀이를 하는 것보다 거칠게 몸을 쓰고 뛰어노는 것을 더 좋아했고, 위험한 장난을 즐겼다. 순진한 친구들을 꼬셔서 어른들이 절대로 하지 말라고 금지한 일을 하고야 마는 것이 그 시절 나의 아주 큰 즐거움이었다. 나는 동네에서 알아주는 개구쟁이 악동이었다.
할머니는 나의 그런 점을 아주 싫어했다.
나는 애교 많고, 조용하고, 사근사근한 손녀여야만 했지, 놀이터에서 온몸이 흙투성이가 되도록 뛰어놀거나, 친구들 사이에서 대장 노릇을 하거나, 마음에 안 드는 남자애 머리통을 쥐어박는 손녀여서는 안 되었다.
'머스마' 같은 손녀는 결코 할머니가 원하는 손녀가 아니었다.
나는 자주 내가 '나 답기’ 때문에 혼이 나야만 했다.
동요를 부르며 애교를 부리다가 신이 나서 펄쩍펄쩍 뛰기 시작하면 계집애가 뛴다며 혼이 나기 일쑤였다. 나는 동물 모양 장난감을 아주 좋아했는데, 그것들로 엄마 놀이가 아니라 변신 로봇 놀이나 동물원 사육사 놀이를 하면 계집애가 그렇게 논다며 꾸중을 들었다.
나는 여자아이들이 좋아한다고 흔히 알려진 미미나 쥬쥬 인형에는 도통 관심이 없었다. 아빠는 내게 인형 세트를 아주 많이 사주었지만, 내가 좋아했던 건 인형 그 자체가 아니라 인형이 포함된 장난감 세트였다. 미미의 자동차 세트, 피크닉 세트, 백화점 세트, 병원 세트 같은 것 말이다. 영화 속 작은 스튜디오처럼 만들어진 그 세트들을 나는 아주 좋아했다. 나는 인형 세트를 선물 받으면 인형은 휙 내팽개치고 그 세트장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상상하는 다른 놀이를 즐겼다.
그러나 그런 나도 인형을 좋아하기는 했다. 특히 동물 인형을 좋아했는데, 그건 여자애라서가 아니라 동물이 좋아서였다. 엄마는 내가 '인형'이 아니라 '동물'에 집중한다는 걸 금방 알아챘지만, 아빠는 끝까지 그걸 이해하지 못했다. 어쩌면 이해하고 싶지 않았던 걸 수도 있다.
아빠는 내게 커다란 곰 인형과 내 평생의 친구가 된 강아지 인형을 사주었지만,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미미와 쥬쥬 인형을 사다 날랐다. 울음소리가 날 때마다 젖병을 물리고, 기저귀를 갈아줘야 하는 콩순이 인형 같은 것도. 역시나 나는 청진기와 가짜 주사기가 포함된 콩순이 병원 놀이 세트는 좋아했지만, 아픈 콩순이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내가 제일 좋아한 장난감은 움직이는 자동차와 레고였다. 자동차도 그냥 바퀴만 굴러가는 단순한 자동차가 아니라 꽤 크기가 있어서 버튼이나 핸들을 조작하면 내가 원하는 대로 땅을 파고, 짐칸이 내려가는 중장비 자동차 장난감이 좋았다. 내가 제일 좋아한 자동차 장난감은 포클레인과 트럭이었다.
그러나 아빠는 내게 그런 장난감들을 사주지 않았다. 내가 중장비 장난감을 보고 눈을 반짝거리며 사달라고 해도 아빠나 할머니는 절대 그런 장난감을 사주지 않았다. 계집애답지 않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나마 레고는 조금 사주었는데, 레고가 어린아이 지능 발달에 도움이 된다는 캐치프레이즈가 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레고도 내 마음대로 고를 수는 없었다. 나는 동물 모양이 들어 있거나 여자아이 전용으로 나온 레고만 살 수가 있었다. 내가 원하는 경찰청, 소방서, 해저 탐험 레고는 물론 집을 짓는 세트나 각종 직업 체험이 가능한 레고 세트는 꿈도 꿀 수가 없었다.
하지만 레고의 장점은 누구나 다 알고 있듯이 정해진 틀에 맞추어서만 노는 게 아니라 아이가 자유롭게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게 아닌가? 나는 얼기설기 얻은 작은 레고 세트들에서 모은 블록들로 내 마음대로 자동차를 만들거나 집을 지으며 놀았다. 그때마다 할머니는 옆에서 큰 한숨을 내쉬며 끌탕을 해댔지만.
그러나 결국 나도 시간이 흘러 중장비 자동차 장난감과 내가 원하는 레고 세트들을 손에 넣을 수가 있었다. 물론 그것들은 나를 위한 장난감이 아니었다.
내가 태어나고 2년 뒤, 남동생이 태어났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