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프랑스 방랑기
어느 아침 서울의 한 지하철 역. 바쁜 출근길 속 욕설과 응원을 한데 받으며 시위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장애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이다. 지금 우리(라고는 하지만 모든 사람을 포괄하지 않는다.)가 보고 있는 대한민국은 불편함 없이 바쁘고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것만 같다. 우리가 매일 올라타는 버스와 지하철, 빨강과 초록이라는 색만으로 도로 위 질서를 지휘하는 신호등, 한 계단씩 오를 때마다 수명이 늘어나는 수많은 카페와 식당과 건물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프랑스의 다채로움을 경험하고 온 나는 지금 대한민국의 평범함이, 누군가에게는 다른 이의 아침을 방해하면서까지 바꾸고 싶은 이 평범함이 조금은 아니 사실은 많이 아쉽다.
파리의 이곳저곳을 걸어 다니다 뜻밖에 파이브가이즈 Five guys라는 패스트푸드점에서 대한민국에서는 본 적 없는 이색적인 풍경을 발견했다. 단지 유럽의 건물 양식, 사람들의 생김새, 익숙지 않은 색다른 문화가 아니라 그들의 삶에 녹아있는, 예를 들면 매너가 몸에 밴 사람들이 의식 없이 뒷사람을 위해 문을 잡아주는 듯한 그런 종류의 체취였다. 그것은 겨우 2층짜리 건물에 자리 잡은 패스트푸드점 정 가운데를 관통하는 엘리베이터다.
나와 J는 북적거리는 주말의 파이브가이즈에 들어와 사람들 틈에 뒤섞어 떠밀리듯 햄버거와 셰이크를 주문하고, 그렇게 많은 손님에도 10분이 채 되지 않아 모습을 드러낸 우리의 점심을 들고 2층으로 걸어 올라왔다. 그리곤 프랑스에서 제대로 먹는 첫 음식이 미국의 프랜차이즈 햄버거라는 데 어이없는 웃음을 흘리며 자본주의 대륙의 맛을 음미했다. 배가 조금씩 불러오자 음식에 꽂혀있던 시선은 자연스레 주변으로 옮겨졌다. 조용히 각자의 식사에 집중하고 있는 친구로 보이는 남자 2명, 얼마나 재밌는 이야기를 하는지 궁금하게 만드는 환한 웃음을 들려주던 여자 3명, 바쁜 매장에서 여기저기 이동하며 모두가 깨끗한 식사를 즐길 수 있도록 묵묵히 청소하고 있는 아르바이트생, 저 끝에 위치한 낯익은 셀프바, 그리고 큰 존재감으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엘리베이터.
“여긴 2층밖에 안 되는데 엘리베이터를 왜 만들었을까?”
“어? 그러게.”
수많은 사람들이 1층에서 2층 사이를 수도 없이 오르내리는 중에도 저, 공간의 정 가운데를 뚫고 있는 뜬금없는 엘리베이터는 요지부동이었다. 이해하기 어려운 이들의 건축을 고민하고 추측하던 그때 J가 입을 열었다.
“몸이 불편하신 분들이 이동할 수 있도록 만들어둔 건가?!”
유레카. 저 엘리베이터가 사용되는 모습을 목격하지는 못했지만, 지금껏 2층짜리 상가에 엘리베이터가 있는 풍경을 마주한 적은 없었지만, 그래서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실질적인 근거는 아무것도 없지만 우리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저 동물의 권리를 위해 싸우고,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불편함을 감수하고, 다양성을 인정받기 위해 소리치고, 힘이 없는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움직이는 사람들을 근거로, 그런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근거로, 그들이 우리의 이웃이라는 것을 근거로 말이다. 프랑스 여행에서 느낄 것이라 단 한 번도 예상하지 못했던 이색적인 체취를 맡으니 그제야 감각의 기억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딱히 쓸모없을 거라고 구석에 규칙 없이 저장해 뒀던 기억들이 끄집어내 진다. 그러고 보니 어제 화장실 때문에 잠깐 들렀던 맥도널드도 2층 상가인데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개선문 옥상에는 탁 트인 전망을 보기 위한 계단과 경사길이 어우러져있었고, 계단 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엘리베이터가 조용히 숨어있었다. 루브르 박물관부터 오르세 미술관, 개선문 등 파리의 유명 명소에서는 장애인 증명서가 있으면 긴 입장권 구매 줄에 서서 대기할 필요 없이 당연하다는 듯 우선권이 부여됐고, 심지어는 요금 할인 혹은 무료입장 혜택이 주어졌다. 본인을 도와줄 동반 1인에게까지 함께 말이다. 아, 내가 밟았던 파리의 이곳저곳에 너무도 자연스러워 알아채지 못한, 그래서 그냥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였던 프랑스의 문을 잡아주는 배려가 스며있었구나!
한 번 깨어나 이런 것들을 인식하기 시작한 감각은 프랑스 여행 내내 잠들지 않았다. 버스와 트램에는 계단이 없었고, 길 위에는 두 발로 걷는 사람, 한 발과 지지대로 걷는 사람,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사람, 목발을 짚은 사람. 관광객으로 보이는 백인, 힙합을 좋아하는 듯한 흑인, 배낭 여행객으로 보이는 아시아인, 엄마 손을 잡고 걷는 어린아이, 잔뜩 힘을 주고 나와 인생샷을 건지고 있는 소녀, 파리지앵으로 보이는 바게트를 포장해 가는 중년, 청바지에 흰 티를 입고 세월의 아우라를 뿜어내는 노인. 이곳은 수많은 다채로움이 뒤섞여 무지개 빛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오색의 찬란한 빛을 마주한 그 순간 나는 자연스레 부끄러움을 느꼈다. 겨우 2층 상가에 엘리베이터를 왜 만들었을까를 추측하다니. 이런 배려에 익숙하지 않은 나 자신이, 이들에게는 이미 생활에 스며들어 이질감도 없게 만든 너무도 자연스러운 삶이 우리에게는 추측을 해야 하는 배려라는 사실이 참 부끄러웠다.
한 번은 이런 생각도 했다. 프랑스 파리의 근교 ‘낭트’로 여행 갔을 때였는데 길을 걷는데 문뜩, 정말 문뜩 와닿은 것이었다.
‘여기에서는 길에 장애인이 참 많이 보이는 것 같아. 한국에서는 진짜 보기 힘들었는데.‘
이번에는 굳이 이유를 추측할 필요가 없었다. 그것은 인프라의 차이에서 비롯된 너무나 당연한 풍경이었다. 이곳의 사람들은 다채로움을 인식하고, 받아들이고, 서로를 배려한다. 길을 지나가는 나랑은 조금 다른 사람들을 다르다고 받아들이지 않는다. 중장년 여성이 크롭티를 입던, 휠체어를 탄 사람이 버스에 탑승하던, 남성이 치마를 입던, 여성의 키가 185cm이던, 카메라를 들고 혼자 주절주절 떠들며 걷던, 파리의 아름다움에 눈이 멀어 여기저기 사진을 찍으며 두리번거리고 돌아다니는 사람이던, 그런 것들은 그저 그들의 개성이고 이곳을 이루는 다채로움일 뿐이다.
이제야 이들이 왜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없었는지 이해가 간다. 왜 파리지앵이 서로에게 관심 없는 명사였는지 이해가 간다. 정확히 말하면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그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특이하다고, 다르다고 받아들이지 않기에 나오는 자연스러운 태도였던 것이다. 여의도 A증권 회사에 다니는 직장인이 반대편 B증권 회사에서 나오는 직장인을 굳이 바라보지 않듯이 말이다.
얼마 전 백상예술대상 2023에서 TV 부문 대상을 받은 박은빈 배우가 이런 소감을 했다.
사실 제가 세상이 달라지는데 한몫을 하겠다는 그런 거창한 꿈은 없었지만 이 작품을 하면서 적어도 이전보다 친절한 마음을 품게 할 수 있기를, 또 전보다 각자 가지고 있는 고유한 특성들을 다름으로 인식하지 않고 다채로움으로 인식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연기를 했었는데요.
(중략)
제가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가장 좋아하는 대사는 ”제 삶은 이상하고 별나지만 가치 있고 아름답습니다. “라는 대사였는데요. 영우를 통해서 이 이야기를 전할 수 있어서 정말 기뻤습니다.
나는 알아도 남들은 모르는, 또 남들은 알지만 나는 알지 못하는 그런 이상하고 별난 구석을 영우가 가치 있게 생각하라고 얘기해 주는 것 같아서 많이 배웠습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라는 드라마를 통해서 다채로움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그녀가 이번에는 소감을 통해 그것을 환기시켰다.
영우와는 차원이 다른 시선이었겠만 나 역시 어렸을 때부터 수많은 타인의 시선을 받아왔다. 어렸을 때부터 유별나게 큰 키 덕분이다. 그들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받았던 시선들은 나의 허리를 굽게 만들고, 사람이 많은 곳을 피하게 만들었다(물론 지금은 모두 극복했다!)
누군가로부터 다름의 시선을 받는 것은 상상하는 것보다 꽤 괴로운 일이다. 나를 다수를 구성하는 그들과 다르다고 규정하고 따돌리는 듯한 기분이라 외롭기도 하고, 나를 다르게 대하는 그들을 미워하기보다 왜 그들과 다르게 태어났을까, 왜 그들과 다를까라며 나 자신에게 미움을 돌린다.
다르다는 시선을 받는 것조차도 이리 힘든데 다른 삶을 강요받아야 하는, 다른 사람들의 아침을 방해하면서까지 이러한 사실의 변화를 요구하는 이들은 얼마나 막막할까 감히 상상할 수 없다.
내가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것들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리고 이것들은 다름이 아니라 다채로움이라는 것을, 이 다채로움이 잘 품어져야 아름다운 무지개가 된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