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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기린 Jul 10. 2023

6. 삶과 일의 균형(2)

2022 프랑스 방랑기

 낭트에서의 여유로운 여행을 마치고 우리는 리옹으로 향한다. 아무런 계획 없이 마주한 곳이었지만 자전거로 동네 한 바퀴를 돌아보기도 하고, 프랑스인들이 북적거리는 식당에서 가성비 넘치는 런치 세트도 먹어봤으며, 아이들의 동심에 섞여 기계로 만든 코끼리와 신나는 추억을 만들기도 했다. 아무 계획 없는 여행은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던 나의 생각이 큰 오해였다는 가르침을 준 고마운 곳이다. 오히려 계획이 없기에 마주할 수 있었던 풍경과 사람들, 그리고 목적 없는 발걸음의 가벼움은 시간이 지날수록 선명해질 것이 분명하다.


 낭트에서 리옹까지 6시간이 넘는 시간을 달려왔다. 생각보다 쾌적했던 기차와 프랑스에서 빠져버린 드라마 '빅마우스' 그리고 전날 사둔 과자와 젤리 덕분에 긴 이동 시간임에도 그리 답답하지는 않았다. 밤 9시가 넘어서야 만날 수 있던 리옹과의 첫인사는 다음날로 미루고 우리는 도착하자마자 숙소로 달려갔다. 에어비엔비를 통해 예약한 곳이었는데 열쇠를 사용하는 공동주택이다.

  엘리베이터가 없어 짐을 이고 커다란 계단을 올라 숙소 문 앞에 도착했다. 왼쪽과 오른쪽에 각각 한 개씩 서있는 거대한 문. 숙소 주인의 문자를 보니 오른쪽으로 들어가란다. 파인 홈에 열쇠를 넣고 오른쪽으로 두 바퀴를 돌렸다. 그리고 문 손잡이를 돌려 미는데 꿈쩍도 않는다. 방향을 잘못 돌린 건가 싶어 이번에는 왼쪽 방향으로 두 바퀴를 돌렸다. 다시 문 손잡이를 돌려 밀었지만 여전히 우리 앞의 이 거대한 문은 굳건하다. 다시 한번 문자를 확인한다.


'혹시 오른쪽이 여기가 아니고 반대편이 아닐까? 사장님이 계단이 아니라 벽을 등진 기준으로 알려주셨나 보다.'


반대편에 있는 문 앞으로 간다. 지금은 오후 10시가 넘은 시간. 이웃들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 조용히, 그러나 장시간 이동으로 피곤한 우리를 위해 재빠르게 다음 행동을 진행한다. 그런데 이 문도 꿈쩍하지 않는다. 무엇이 문제일까. 다시 한번 도전하고 싶지만 혹시나 그곳이 이웃집이라면 우리는 도둑과 같은 모양새가 된다. 괜한 오해가 생기는 일은 없었으면 하는 마음에 결국 늦은 시간임에도 사장님에게 문자를 보냈다. 3분이 지날 때까지도 답이 없고 우리는 정신이 없다. 머릿속에 수많가지 생각이 스친다.


'이러다 못 들어가면 어쩌지. 다시 한번 열쇠를 돌려볼까. 다른 숙소를 알아봐야 하나. 그 숙소들은 지금까지 문을 열었으려나. 밤에 돌아다니면 위험한데. 아니면 그냥 여기 계단에서 밤을 새워야 할까.'


머릿속에서 몇 가지의 시뮬레이션을 돌리고 있을 무렵 다행히 답장이 왔고, 사진을 주고받으며 문자 속 방향의 기준을 확신한 후에야 열쇠를 돌리고 숙소로 들어올 수 있었다. 우리 기억 속 리옹의 첫인상은 어느 골목에 위치한 공동주택 안 조용한 복도와 찰칵거리며 돌아가는 열쇠의 소리로 남게 되었다.




 리옹 여행을 준비하다 보면 '부숑'이라는 단어가 종종 보인다. 부숑(bouchon)이란 리옹의 전형적인 가정식 식당을 의미하는 것으로 미식의 도시라고 불리는 리옹에 갔다면 꼭 한 번쯤은 방문해야 하는 곳이다. 그래서 그런지 유명한 부숑에서 예약 없이 식사를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나와 J는 리옹에 도착한 둘째 날 동네를 돌아보기로 했다. 신시가지의 론강에 앉아 물멍도 때리고, 구시가지의 송강 다리 위에서 사진도 찍으며, 젤라또 아이스크림을 먹고, 관광지에도 들러봤다. 그리고 마지막 코스로는 부숑에서 마무리할 예정이다. 당일 아침 메일로 예약을 신청해 뒀던 부숑에서 오후 5시가 되어서야 답장이 왔다. 오래 기다린 답의 내용은? <예약 불가>...


 우리는 오후 5시가 넘어서야 다른 부숑을 찾기 시작했다. 지도를 살피고, 유럽 여행 카페에 검색해 보고, 네이버 블로그 후기를 뒤적거리며 미슐랭을 받은 곳부터 총 5~6개의 부숑을 찾았다. 그리고 위치 확인을 위해 구글 지도에 검색했는데 굉장히 당황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정말 거짓말이 아니라 찾았던 모든 부숑의 영업시간이 오후 7시, 8시에 시작해서 짧으면 2시간, 길면 4시간만 운영을 하는 것이었다. 어떤 곳은 점심시간 2시간, 저녁 시간 2시간으로 하루에 총 4시간만 영업하는 곳이 있었고, 또 어떤 곳은 저녁에만 4시간 운영하는 곳이 있었다. 우리는 그때 깨달았다.


'아, 이래서 아까 론강에 사람이 그렇게 많았구나!!!'


5시간 전으로 돌아가보자.


숙소에서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정오쯤 밖으로 나온 우리는 신시가지와 구시가지 사이에 위치한 론강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들린 마트에서 레몬타르트 과자와 음료를 사들고 간 우리는 다리 근처의 계단식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평일 오후, 한국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을 하고 있을 시간이라 우리는 한산한 론강의 풍경을 예상했다. 그러나 그곳은 점심을 먹으며 친구들과 수다 떨고 있는 사람부터 자전거를 타는 사람, 강아지와 산책 나온 사람, 오피스룩을 입고 헤드셋을 낀 채 산책하는 사람, 피크닉을 나온 듯한 가족, 스피커로 힙합을 들으며 흥얼거리는 사람, 그 노래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사람, 가만히 앉아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그걸 바라보고 있자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저 사람들은 직업이 뭘까? 모두가 백수는 아닐 텐데. 그렇다고 이 많은 사람들이 다 프리랜서는 아닐 테고. 여기도 연차 제도가 있나? 점심시간이 긴 건가? 도대체 얼마나 길어야 가방까지 챙기고 나와서 킥보드를 타는 거지? 저건 퇴근 차림 아닌가..? 집을 왔다 갔다 하는 건가.'


정말 별의별 생각을 다 했다. 한국에서 흔한 일은 아니니 쉽사리 그 이유를 예상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그들에게 직접 묻기에 나는 프랑스어의 'ㅍ'자도 몰랐다. 이유가 뭐던 간에 우리는 그들이 부러웠을 뿐이다. 평일 낮에도 자유롭게 즐길 수 있는 여유 시간이 있다는 것과 저들 모두의 표정에 근심이 보이지 않는 것, 조급함은 찾아볼 수 없는 여유로운 행동까지. 물론 이 모든 것은 이방인의 시선에 씌워진 필터의 영향도 있을 테다. 그럼에도 한 가지 확실한 건 이곳의 사람들은 흔히 '워라밸'이라고 부르는 삶과 일의 균형이 조화로워 보였다.


그리고 5시간 후 우리는 이런 론강의 풍경을 만들었던 이유와 낭트에 영업을 안 하는 상점(삶과 일의 균형(1) 참고)들이 널려있던 이유를 추측할 수 있었다. 하루에 평균 8시간, 길면 24시간 영업하는 식당들이 즐비한 한국과는 다르게 평균 4시간만 영업하는 이곳의 부숑들을 보며 말이다.


결론적으로 오후 5시가 넘어가는 시간에 식당을 찾던 우리는 부숑이 영업을 시작하는 시간까지 기다릴 체력이 없었고, 구글 지도를 열심히 뒤적거린 끝에 브레이크 타임이 없는 가성비 부숑을 찾아 저녁을 먹을 수 있었다.




프랑스 여행을 마치고 한국에서 부산 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그곳의 게스트 하우스에서 프랑스 여행객을 만나 대화를 가졌는데 여기서 난 또 한 번 그들의 워라밸에 질투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에서 직업이 뭐야? 학생이라 방학 때 여행 온 거야?"


"아니. 나는 자동차 수리공이야. 지금 휴가라서 그 틈에 친구랑 한국 여행 왔어."


"오, 휴가 때 얼마나 쉬는데?"


"한 달 정도? 프랑스에서는 보통 그렇게 쉬거든."


"한 달?! 대박. 진짜 부럽다. 우리는 보통 일주일 쉬는데."


"일주일? 너무 짧은 거 아니야?"


우리는 서로에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에서는 긴 휴가가 평범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유럽 안에서도 이렇게 오래 휴가를 갖는 나라는 흔하지 않다고, 파업도 많이 하고 노동자의 권리를 중요시하는 나라라서 복지가 좋은 편인 것 같다고 이야기를 해줬다.




 이 글을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느냐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다. 우리와 다른 프랑스의 워라밸을 소개하고 우리의 워라밸에 대해 생각할 여지를 던져주고 싶었다고.

일을 위해 나를 희생하는 것이 당연했던 시대가 조금씩 변하고 있다. 삶과 일의 균형을 중시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워라밸이 불균형하다는 이유로 직장을 옮기는 친구들이 많아졌다.


개인적으로 굉장히 긍정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워라밸을 신경 쓴다는 것은 내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고민이 아닌가 싶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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