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꿉놀이는 참 재밌었는데. 금모래는 밥, 꽃은 반찬. 남자 여자 갈라져서 싸우기도 많이 했지만 소꿉놀이할 때는 무슨 조화인지 동네 머슴애들은 얌전해졌고 금모래로 지은 밥을 냠냠해 주었다. 근데 양반다리 하고 먹기만 했다. 소꿉장난도 따져보면 역할 놀이이니 그 시대가 반영될밖에. 지금은 꼬맹이들이 어떻게 소꿉놀이를 하는지 모르겠네. 흙 가지고 놀지는 않겠구나.
직장 마치고 제사 지내러 반은 시골인 시댁에 갔다 오면 너무 늦어서 담날 일하러 가기가 힘들었다. 그래서인지 어머니는 음식도 다 해 놓으시고 내게 일을 시키지 않으셨다. 우리 집에서 제사를 모시기 시작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어머니는 연세가 드셔서도 보기 드문 미인이었다. 얼굴만 고우신 게 아니라 살결은 희다 못해 눈부시고 키도 훤칠 몸매도 하늘하늘. 나는 어머니를 보면 늘 목이 긴 구슬픈 학이 생각나곤 했다.
눈에 띄게 고운 어머니를 졸졸 따라다니며 하루가 멀다고 어떤 날은 밀감 들고, 다른 날은 바나나 안고 집으로 찾아오던 나이 많은 아버님께 하는 수 없이 시집왔다. 그런데 그 열렬한 사랑도 덧없지. 다른 살림을 난 남편 때문에 평생 홀로 자식 둘을 키우셨다. 그럼에도 남편 집안 제사는 어머니가 꼬박꼬박 챙기셨다. 내 아들 잘 되라는 마음 하나였을 것이다. 아무것도 모른 채 어린 나이에 시집와서 긴 세월 제사를 혼자 모셨다. 며느리가 들어오면 옳다구나 하고 제사를 물려주고 감 놔라 배 놔라 시어머니 용심을 부릴 만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러지 않으셨다. 그 고충을 일하는 며느리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으셨는지 돌아가시기 전에 제사를 절에 올리셨다. 생전에 정리를 하고 가신다고.
명절에 여인들의 스트레스가 장난 아닌 나라이니 나도 온당치 못한 이러한 풍습이 싫었다. 19세기나 넘어 거한 상을 차리는 풍습이 생긴 것이지 역사적 내력이 있는 것도 아니라 들었고. 다행히 어머니의 정리로 우린 제사가 없고 명절이면 범어사에 모신 조상께 절하고 온다. 나와 남편도 자식에게 당연, 제사 풍습을 지우지 않을 것이다. 주객전도된 풍습이 무슨 의미가 있다고.
살아있을 때 아낌없이 서로 사랑하는 것.
명절이 오면 제사 대신 그 마음을 다시 먹는 날로 삼는 게 낫다. 조상님들의 안녕과 고마움은 절에 가서 기도드리고.
겨울은 날이 건조하여 꽃들이 제 색을 잃지 않고 물기만 보내니 이렇게 마른 꽃이 되면 또 내 혼을 빼놓는다. 바스락바스락 분홍으로 자주, 보라로 자기들 얘기를 나한테 열심히 재잘댄다. 손바닥에 올리려 치면 가벼이 폴짝 뛰어오른다. 이쁜 나를 춤추게 해 주세요.
참말로 꽃과도 같던 어머니셨다. 미인박명이라던가. 아들 내외가 일한다니 하나 손주 금쪽 같이 키워주시고 이제 좀 즐길 만하신 때에 많이 아프시다 삼 년 고생 끝에 돌아가셨다. 오늘 마른 꽃을 앞두니 예쁘기만 했지 심장은 물기 없이 파스락대기만 했을 어머니가 떠오른다.
설날엔 으레 것만 먹으니 꽃밥 정식을. 보기만 해도 배부르다. 국물은 각자의 촉촉함으로 대신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