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의 힘으로 가보자고! 오히려 좋아!
0% 아니면 100%의 확률. 내가 당하면 100%고, 아니면 0%라던데. 우리 말론 모 아니면 도쯤 될까. 여행 중반을 넘어선 어느 날, 결국 내게도 '그 일'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평소 상상만 하고 이내 '으 소름이다' 하며 몸서리치던 일이었다. 여행 카페에서 생생한 후기를 접할 때마다 '난 절대 안 당해'라고 고개 저었던 그 일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소매치기를 당했다. 그것도 여행자의 분신과도 같은 배낭을. 그것도 유럽 여행 마무리를 단 이틀 남겨놓고 말이다! 종교도 없는데 이상하게 하나님을 찾게 된다. 맙소사, 하나님 아버지 제게 왜 이런 시련을!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우리 유럽 여정의 마지막 도시, 로마에 도착한 날이었다. 이날 역시 하루라도 숙박비를 아껴 볼 요량으로 야간 버스를 타고 넘어온 참이었다. 동이 트지도 않은 시각, 고단한 두 여행자는 눈을 비비며 버스에서 육중한 몸뚱이를 겨우 끌어내렸더란다. 로마엔 비가 세차게 쏟아지고 있었다. 우린 잠시 가방을 내려두고 숨을 돌렸다. 한 가방은 땅바닥에, 나머지 한 개는 벤치 위에 올려둔 채로. 하품도 하고, 기지개도 켜며 나름대로 맑은 정신으로 로마를 맞이할 준비를 했다. 벤치 바로 뒤엔 버스 티켓을 파는 작은 가게가 있었다. 그 순간 뭐에 홀린 듯이 버스표를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곤한 마음에 빨리 터미널을 떠나 숙소로 가고 싶었던 모양이다. 곧장 나는 남자친구에게 "오빠 나 표 사 올게!" 하고는 가게 안으로 쏙 들어갔다. "1회권 두 장 주세요. 하나에 1.5유로 맞죠?" 하고 돈을 건네려는 그 순간, 남자친구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가방이 없어!" 뭐라고? 믿기지 않았다. 말도 안 돼. 가방이 없어졌다니? 그런데 사실이었다. 벤치 위에 올려둔 남자친구 가방이 온데간데없었다. 그 뒤론 정신없이 뛰었던 기억밖에 없다. '멀리 가진 못했을 거야. 잡을 수 있어. 있다고!' 미친 듯이 긍정 회로를 돌리며 비를 뚫고 그저 달렸다. 그때 한 남자가 너무도 평온한 표정으로 반대편 방향을 가리켰다. 난 그의 말을 철썩 믿고 방향을 돌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도 한 패였던 게 아닐까? 내가 원래 뛰어가던 방향은 지하철역이 있던 곳이었다. 반대편엔 아무 것도 없는 공터였다.)
아무튼! 누구나 예상 가능한 결말. 통쾌하게 소매치기범을 잡는 영화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체 그 큰 가방을 이고 지고 어디로 갔단 말인가. 이쪽 지리를 잘 알기라도 하면 어디든 가볼 텐데. 생전 처음 와 본 도시에서 이방인이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애꿎은 쓰레기통만 뒤지며 도둑이 가방을 버리고 갔길 간절히 바랐다. 그 사이 신발 속엔 빗물이 잔뜩 들어찼고, 내 마음속에도 눈물이 가득 찼다(실제로 울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어이없어서 눈물은 안 나왔다.)
당황스러웠다. '진짜 가방을 도둑맞았다고? 진짜로?' 이내 쓰린 마음이 쓰나미처럼 마음을 덮쳤다. 코로나 시국에 관광객 지갑 맛을 못 본 소매치기들이 요즘 극성이란 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유럽에 발을 디딘 그 순간부터 지난 5개월간 늘 '미어캣 모드'로 주의하고 경계했다. 특히 파리, 바르셀로나처럼 소매치기 성지로 불리는 곳에선 2인 1조로 감시망을 돌리며 조심 또 조심했다. 그렇게 우린 무사히 물건을 지켜냈고, 마지막 도시 로마까지 닿았던 참이었다. 로마에서 주어진 시간은 이틀. 이틀 후엔 유럽을 떠나 새로운 대륙에서 다시 새로운 여행을 시작할 계획이었다. 지난 유럽 여행은 순탄했고, 돌이켜보면 행복하지 않은 순간이 없었다. 신기할 정도로 좋은 일이 가득했던 즐거운 여행이었다. 그런데 그 마무리를 가방 도난이라는 실로 끔찍한 에피소드로 장식하게 돼 매우 유감이었다. 차라리 강도가 강제로 가방을 빼앗아 간 거라면 이 정도로 속상하진 않았을 것 같다. 그건 불가항력인 일이니까. 가방을 내어주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할 테니까. 오히려 가방만 달라는 강도에게 감사하며 가진 것을 전부 내어줬을 것이다. 그런데 이건 정말 너무하잖아요! 단 한순간 긴장을 내려놓은 결과가 가방 도난이라니요!
마냥 속상하기만 할 순 없는 일. 경찰서로 가 도난 리포트부터 작성하고, 냉정하게 사고하기 시작했다. 자, 그래서 우리가 지금 잃어버린 게 무엇 무엇이지? 사실 남자친구 배낭 안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물건뿐이었다. 나흘 묵은 빨랫감과 긴 여행을 통해 해진 옷가지들, 트래킹화와 쪼리, 세면도구, 약통, 충전기 선 등등. 도둑도 집에 가서 가방을 열어보고 김이 팍 샜을 테다. 당신이 그토록 찾는 돈이나 전자제품은 거기 없어요. 미안하게 됐수다.
잃어버린 물건이야 다시 사면 그만이다. 전재산이라 할 수 있는 노트북과 외장하드, 카메라, 지갑, 여권 등은 무사히 내 품에 있다. 오히려 중요한 물건을 지키고, 쓸데없는 가방을 내어준 것에 안도해야 할 노릇이었다. 하지만 사람인지라 마음 한편이 계속 쓰라렸다. 잃어버린 가방은 우리가 세계여행을 준비하며 가장 먼저 마련한 커플 아이템이었다. 그간 수도 없이 가방을 풀고 싸며 그 속에 얽힌 추억만도 한 보따리다. 짝꿍 가방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내 가방만 덩그러니 남았다. 우리가 늘 함께하듯, 두 가방도 늘 함께 붙어있었는데. 속상하고 속상했다.
그렇게 그로기 상태로 숙소에 돌아왔다. 꼬박 하루 넘게 제대로 못 잔 데다, 비를 쫄딱 맞아 온몸이 축축하고, 가방까지 잃어버렸다. 단언컨대 여행 도중 맞이한 최악의 날이었다. 숙소 근처에서 대충 밥을 때우고 일찌감치 잠에 들어 지친 영혼을 토닥였다. 그런데 다음날이 되니 이상하리만치 몸과 마음이 가벼웠다. 그래! 중요한 물건은 하나도 안 잃어버렸잖아? 옷이야 다시 사면되지 뭐! 같은 천진한 생각만이 떠올랐다. 어디 하나 다친 데 없고, 오늘도 맑은 정신으로 새로운 하루를 보낼 수 있다는 생각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여행하다 보면 긍정의 힘을 새삼 많이 깨닫는다. 낯선 공간에서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긍정적인 사고만큼 정신과 육체에 큰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게 없다. 그렇게 우린 로마에서의 남은 이틀을 야무지게, 그리고 알차게 즐겼다. 로마 건축의 걸작으로 불리는 판테온과 오드리 헵번이 젤라토를 먹었던 스페인 광장, 그 옛날 검투사의 투혼이 느껴지는 콜로세움까지 열심히 발자국을 남겼다. 유구한 역사를 간직한 로마는 소문만큼이나 풍성하고 풍요로운 도시였다. 편한 마음으로 도시를 즐기던 우리는 "야 가방 하나 없으니까 되게 편하다?"라는 실없는 농담까지 주고받았다. 어쩌면 우리는 이번 사건(?)으로 한층 더 성장했을지 모른다. 앞으로 인생에 찾아올 크고 작은 위기를 매번 의연하게 넘길 순 없을 테다. 그래도 조금은 더 성숙한 모습으로, 길 위에서 배운 긍정의 마인드로 구렁이 담 넘어가듯 유연하게 살아볼 생각이다. 요즘 내가 정말 좋아하는 말! (가방 없으니까 가벼워서) 오히려 좋아! 가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