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winterbreak Feb 27. 2023

디자인의 피드백을 받던 어느 날

평온에도 메뉴얼이 있다면

신제품 디자인이 쏟아졌다. 그래도 마무리 단계인 인쇄가 아니라 디자인의 시작 단계라는 게 기뻤다. 오랜만에 본업을 하는 느낌이었다. 3일동안 공들여서 앞으로 나올 시리즈의 첫 제품을 디자인하고, 제안서를 작성했다. 디자인의 방향과 근거가 되는 기획과 컨셉을 엮어 결과물을 제안하는 일이다.


제안서도 마음에도 들었고, 반응도 나쁘지 않았다. 대표님에게서 빠른 피드백이 왔다.


“A안이 가장 좋아보이네요. 그런데 B안을 이렇게, C안을 이런 C-1, 저런 C-2로 각각 수정해주실 수 있나요? 한번 보고싶어서요.”


“네.“ 라고 대답했지만 나는 근거가 궁금했다. 왜 B안을 이렇게, 무슨 이유로 C안을 저렇게 수정해보라는 걸까?



그런데 그 때 내 디자인이 평가되고 피드백되는 방식을 알게되었다. 한 직원이 내게 다가오며 말했다.


“이번 디자인 좋던데요! A안이 가장 인기가 많더라구요.”

“아 그래요? 그런데 누가 선택을 했는데요?”

“아, 단톡방이 있는데 거기서 투표했어요.”


나는 처음으로 그 단톡방의 존재를 알게되었다. 내가 없는 단톡방에서 투표를 거치고, 의견을 주고받은 후 그 피드백이 나에게 오는 거였다.


처음엔 거부감이 들었다. 내가 프리랜서도 아니고, 외부에 있는 사람도 아닌데 왜 굳이?

그러다가 왜 이런 방식을 선택했을까 고민해봤다. 곧 효율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매번 디자인이 나올 때마다 미팅을 열 수도 없으니 직원들의 의견을 추합해 피드백 하기도 좋고, 내가 없는 자리여야 자유로운 의견이 오갈 수 있을 것이다. ‘괜찮네’ 라고 생각했다.


옆에서 단톡방을 쭉 훑어봤다.

직원A가 ‘저는 이런 이유로 A안이 좋은데, B안도 이렇게 수정해보면 괜찮지 않을까요?라고 하고,

직원B가 ‘저는 C안이 좋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은 조금 이렇게 보일 수도 있어서 이런 방식으로 수정하면 좋지 않을까요?’라고 쓴 글을 보고 심장이 빠르게 두근거렸다.

내가 이래서 B는 이렇게, C는 저렇게 수정하게 된거구나… 그걸 보고나니 팀도 없이 혼자 일하는 게 더 쓸쓸해졌다.


하라는대로 수정해서 보내면 단톡방에서 다시 평가를 받는건가? 솔직히 그건 상관 없었다. 의견을 받으면 내게도 좋은 일이다.

문제는 수정의 직접적인 이유를 공유받기 힘들다는 거다. 그 동료가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누가 어떤 시안을 무슨 이유로 선택 했는지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의견이 나오면 빠짐없이 반영해서 ‘어떻게 되는지 한번 보여주기 위한 수정’을 하는 거였으니 의견 추합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았다. 내 손목이 아깝다는 생각을 했다.


‘차라리 단톡방을 캡쳐해서 보내주지… 그게 훨신 효율적이네요.’


마음속에서 이미 큰 감정의 파도가 치고 있었다. 이런 과정에서 어떻게 보람을 느낄 수 있지?

퇴근 시간이라 나는 짐을 챙기며 웃었다.


“아 그래요… 저도 A가 가장 좋아요.”


이때부터였다. 나는 점점 ‘디자인이 뭘까?’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품게 되었다. 내가 디자인으로 돈을 벌고 있긴 하지만 아직 잘 모르고 있는 거 같았다. 이런게 진짜 디자인을 잘 하기 위한 방법은 아닌 거 같았다. 디자이너를 존중하는 문화는 더욱 아닌 거 같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첫 회사의 저주, 불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