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블록체인과 중앙은행, 그리고 가상자산
급속도로 성장하는 블록체인 기술의 범람 속에서 시중 은행은 어떻게 이 물결 위로 올라탈 수 있을까요? 탈중앙화(Decentralization) 시스템인 블록체인과 그 반대인 중앙은행 시스템이 결합될 수 있을지 사람들의 관심이 높습니다. 가장 친숙한 결합 사례는 은행이 가지고 있는 데이터들을 블록체인으로 분산 저장하여 데이터 안전성을 높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역시 데이터를 분산, 저장할 대상에 대한 기준과 고객 동의(자신의 데이터를 누군가 쪼개서 가지고 있다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는 경우도 있겠죠) 등의 논의가 아직 남아있습니다.
월가는 블록체인 및 가상화폐 도입에 적극적입니다. 퍼블릭 체인이 아닌 은행 연합이나 중앙 기관만이 사용하는 프라이빗 체인을 통해 데이터를 보호함으로써 데이터 분산 저장 문제의 리스크를 해결하기도 하고, 가상자산 파생상품 거래소를 인수하거나 (시카고 옵션 거래소), 자체 개발한 플랫폼을 통해 채권이나 채무증권을 거래하는 등(JP 모건 체이스의 오닉스) 블록체인 기술 활용에 활발히 나서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마스터카드는 암호화폐를 통해 결제가 가능하도록 아르헨티나에서 암호화폐 선불카드를 출시하기도 했지만, 아직 미국에서는 갈길이 요원해 보입니다. 최근 통과된 인프라 법에서 암호 자산에 대한 과세를 명시하고 있거든요. 물론 이를 저지하기 위한 법안도 발의되어 미국 의회에서 관련 논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기축통화로서 달러의 위치를 흔들지 않아야 하고, 동시에 가상 자산의 흐름도 놓칠 수 없는 미국의 입장에서는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가상자산인 CDBC를 적극 밀어주고 있지만, 특정 세계(메타버스)에서는 법정화폐나 CDBC가 통하지 않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이런 식의 시장 통제는 장기적으로 유효하지 않다는 평가도 존재하는데요. 해시드 김서준 대표는 한 인터뷰에서 달러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고, 석유 시대가 막을 내리는 지금, "온라인과 모바일을 통해 전 세계가 장벽 없이 더 자유로운 교역을 하고 메타버스라는 새로운 세계가 열리면", "강제로 달러를 쓰라고 할 것이 아니라, 민간이 발행하는 코인을 기존 금융 시스템과 연결해 허용하는 것이 패권 유지에 이롭기 때문에" 미국도 친가상화폐 정책을 펼칠 수밖에 없을 거라고 전망하고 있습니다.
결국 중앙은행이 온라인화, 디지털화되는 사회에서 계속 살아남기 위해서는 블록체인 기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가상화폐에 친화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죠. 큰 규모의 기관이 가상자산 시장에 진입해 치밀한 분석으로 장기적인 투자를 하면 이곳에서도 현실 시장의 논리가 작동할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사기(스캠)를 걸러내는 은행의 능력을 활용하고 작전주를 규제하는 등의 법안을 제도화하는 것이 현재 가상자산이 봉착한 투기성 흐름을 끊어버리는 계기가 될 수 있고요. 상생을 위해 중앙은행이 블록체인 기술뿐만 아니라 가상 자산에도 관용적인 제스처를 내밀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가상자산 이야기가 나온 김에 NFT(대체 불가 토큰, Non Fungible Token) 이야기를 잠시 해볼까요? NFT에 대한 관심은 해외에서 급부상하여 2021년 NFT 거래규모가 약 230억 달러에 이르기도 하였으나 아직까지 국내에서는 거래 유동성이 낮고 관련 법안이 없으며 현금화 과정이 복잡하여 실물 자산으로의 가치는 높지 않습니다.
현재 NFT는 이용자들의 전자지갑에 보관되며, 이를 거래하기 위해서는 거래 플랫폼(오픈시 등)에 전자지갑을 연동한 후 경매 매물을 올려 입찰을 진행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으로는 개인이 가지고 있는 NFT를 판매하지 않고는 현금 유동성을 확보할 수 없습니다. 실물 경제에서 주택 담보 대출과 같이 은행에 주택 자산을 맡기고 현금을 빌리는 시스템을 전혀 활용할 수 없다는 것이죠. 그러니 올해 초 반짝 급등했던 NFT에 대한 관심과 수요가 사그라들 수밖에 없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내가 지불한 금액을 보장받지 못하고 투자 가치도 낮아 보이니 단순 소비재로 여기는 경향이 강해진 것이죠. 한편으로는 NFT를 사용할 수 있는 메타버스 인프라가 확충되지 않은 것도 NFT 가치 하락의 원인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NFT 거래소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오픈시(Opensea)는 NFT에 대한 데이터(창작자, 거래정보, 소유자 등)를 열람할 수 있도록 도와주지만, NFT 자산의 가격이 적당 한지나 투자가치가 있는지 등의 정보는 제공하고 있지 않거든요. 오히려 오픈시가 제공하는 NFT자산의 검증 과정은 거래량과 거래금액, 그리고 오픈시에 연결된 트위터 계정으로, 실물 경제의 자산 평가 과정에 비하면 아주 빈약한 수준이고요. 이러한 문제점들은 이용자들이 러그풀(Rugpull) 사기에 노출되도록 만듦으로써 NFT 자산 가치를 떨어뜨려 실물 자산으로의 활용도를 낮추고 있죠.
그러나 여전히 많은 미래학자들이 메타버스 가상공간 안에서 이용자들이 사고팔고 경험하고 소비하는 모든 것이 NFT가 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습니다. 만약 NFT 아이템의 자산가치를 판별하고 이를 담보로 대출을 중개하며, 담보로 받은 NFT 아이템을 이용해 수익을 창출하거나 전시를 기획하는 등 NFT 자산의 활용방법을 모색하는 곳이 있다면 어떨까요? 수십 년간 실물 경제에서 다양한 자산들을 검토하고 평가하며 축적된 시중은행이 본인들만의 자산 검증절차를 통해 이러한 디지털 자산을 감정하고 관련 전문가를 양성하여 체계적인 절차를 확립하는 것이죠. 아직은 허무맹랑해 보이지만 상용화만 된다면 그간 지적되어왔던 NFT의 가격 변동성 문제를 해소하여 적당한 가치를 환산할 수 있으며 NFT를 단순 소비재가 아닌 투자 자산의 하나로 인지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역시 중앙은행이 올라탈 수 있는 가상 자산 물결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데요. 은행의 신뢰성을 등에 업는다면 이용자들도 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NFT 시장에 진입하게 되고, 이를 바탕으로 블록체인과 가상자산 환경에 자본이 돌고 연구가 계속되는 선순환이 발생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생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