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끈히 끓어오르는 수프 위로 희미해지는 이데올로기의 잔흔들
마주보고 같이 밥을 먹는 일은 관계의 근간을 이룬다. 눈을 마주치고 서로의 음성을 들으며 따뜻한 포만감이 차오를 때, 밥은 핑계이자 소재이자 시간을 함께 보내는 일 그 자체의 상징이 된다. 낯선 이에게 던지는 '밥먹자'는 말은 관계를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신호가 되고 '밥을 사겠다'는 말은 흔히 고마움의 표시이자 관계를 지속하는 의지로 통한다. 식구(食口)라는 말처럼 함께 하는 식사(食事)는 서로에게 특별한 관계성을 부여하는 힘을 지닌다.
재일조선인 2세 양영희 감독의 <수프와 이데올로기>는 그러한 문화적 맥락을 강하게 반영한다. 영화는 제주 4.3을 겪은, 감독의 재일조선인 어머니를 중심으로 한 가족의 이야기를 담아낸다. 가족 다큐멘터리 3부작의 마지막을 장식하듯 영화는 수준높은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다. 가족의 보편성과 역사의 특수성을 모두 농도있게 통찰해낸다.
모순적이듯 입에 감기는 영화의 제목은 꽤 친절하게 영화의 메세지를 관객들에게 암시한다. 수프, 그리고 이데올로기. 재일조선인 이슈는 여전히 국내외적으로 다분히 논쟁적이다. 자본주의라는 망령만이 지배하는 현대 사회에서 '이데올로기'는 마치 구시대적 유물로마저 느껴지지만 이데올로기는 여전히 선명하게 살아있다. 특히나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에서, 이데올로기는 약간의 재가 덮여있을 뿐 언제든 뜨겁게 불타오를 준비가 되어있는 휴화산과 같다. 더구나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극도로 불안한 시기에 정체성이 머물러있는 재일조선인에게는 더욱이 그러하다.
그처럼 날선 갈등을 상징하는 '이데올로기'에 따뜻한 국물을 의미하는 '수프'가 붙었다. 후자가 화합을 상징한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유추해볼 수 있다. 영화 속에서 이 수프는 한국식 삼계탕을 의미한다. 특히 한국에서 삼계탕은 일상적이기보다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며 온 가족이 둘러 앉아 나눠먹는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이 수프는 일본인 사위가 감독의 어머니와 처음 만난 날 대접받은 음식이었다.
이데올로기, 이념은 추상적이지만 강렬하게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여 타인을 쉽게 판단하게 만든다. 타인을 개별 존재가 아닌 이데올로기적 존재로 격하시키며 종종 혐오를 동반한다. 물론 이미 누구에게도 책임지울 수 없이 피해가 양산된 이데올로기적 현실에서 피해자와 가해자의 구분은 모호하다. 일제 시대와 제주 4.3의 끔찍했던 잔상을 선명히 기억하는 어머니에게 그 혐오는 50년이 넘도록 자연스러운 감정으로 자리잡아왔다. 그러나 소중한 막내딸의 사위, 개별 인간과의 조우가 그를 극복하게 만든 것이다. 이러한 맥락 속에 오랜시간 우려낸 어머니의 따뜻한 수프는 보는 이들에게 더욱 큰 울림을 준다.
영화는 동시에 역사적 결과로서의 현재만을 그리지 않고 어머니의 기억을 조심스레 더듬어감으로써 40년대의 이야기와 현재를 긴밀하게 연결한다. 이는 다른 시대에 살고 있는 관객들에게 인물에 대한 이입감을 더해줄 뿐 아니라 수프를 통한 극복의 순간을 더욱 극적으로 만든다. 이로써 특수성과 보편성을 훌륭하게 교차해낸다고 할 수 있다.
어머니는 4.3이 벌어지던 날의 기억을 촘촘하게 더듬어낸 후에 알츠하이머로 당시의 기억을 잃는다. 이는 그 자체로 영화적이다. 피해자로서 풀어내지 못한 한이었을까, 전달자로서 부여받아버린 업이었을까, 50년 동안 응어리져온 기억들을 모두 헤쳐내고서 그녀는 60년대의 평온했던 기억으로 되돌아간다. 가족이 모두 함께했던 바로 그때로. 아픈 기억을 잊었을지언정 가장 행복했던 기억 속에서 어머니는 임종을 맞이한다.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된다”며 몸이 기억하는 두려움을 이겨내고 그는 할 수 있는 몫을 모두 해냈다. 어렵게 전해진 그 이야기를 기억하는 것도, 해체해내는 것도 이제 남은 이들의 몫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어떠한 '수프'를 끓여낼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