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옴니버스 기후위기 다큐멘터리 <바로 지금 여기>
또다시 여름이 다가온다. 작열하며 땅을 달구었다가 억수같이 비를 쏟아내는 여름이 다가온다. 언젠가 찬란한 태양을 떠오르게 했을 그 계절에서 이제는 살의를 느끼고야 만다. 두 해 전 끝내 지하방의 식구를 집어삼키고야 말았던 그 여름밤을 기억한다면 그같은 표현이 비유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쉽게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기후의 변화는 더이상 물러설 곳 없는 ‘진실’이 되었다. 비록 가닿지 못했을지언정 오래전 예고되었던 바로 그대로, 잦은 산불과 폭우 따위의 이상기후가 인간들의 마을을 집어삼키고 있다. 슬프게도 아직 경제의 논리가 팽배한 한국에서 기후위기 따위는 화두에 오르지 못한다.
다큐멘터리 <바로 지금 여기>는 바로 그 한국 사회에서 기후위기에 관한 면면들을 마주한다. 첫번째 <돈의동의 여름>은 기후의 변화를 끈적이는 장판에서 온몸으로 느껴내는 어느 쪽방촌의 여름을, <열음지기>는 번듯한 기계 없이 맨손으로 땅을 일구는 여성농민들의 삶과 연대를, <마주보다>는 어느 청년활동가와 시니어활동가의 같고 또 다른 투쟁기를 담아낸다.
쪽방촌의 여름은 남들보다 더 일찍 시작해 더 늦게 끝이 난다. 기후위기는 바로 이 곳에서 가장 강렬하게 경험된다. 꺾일 줄 모르는 더위에 긴긴 밤을 뜬 눈으로 지새우고 온몸은 금세 땀범벅이 된다. 찬 물을 잔뜩 적신 수건을 온 몸에 끼얹어 보지만 금세 끈적한 습기를 뿜어낼 뿐이다.
돈의동의 형편은 실상 좋은 편이라고 한다. 나름의 공동체가 있는 덕에 머리를 맞대고 더 나은 삶을 살 궁리를 하고 한켠에서는 마을 식당을 운영한다. 굶주린 배를 부여잡고 식당 앞에 무너져있는 이에게 따뜻한 밥 한 그릇 대접하는 온기가 그곳에는 있다.
어느 여름날 서울시장은 ‘약자와의 동행’을 선언하고 쪽방촌에 냉방시설을 설치한다. 느닷없이 설치된, 그야말로 ‘하늘에서 내려온’ 에어컨은 곧 그림의 떡으로 전락한다. ‘전기세’를 운운하는 건물주는 그들에게 ‘리모컨’을, 아니 ‘인간답게 살 권리’를 아주 손쉽게 빼앗는다. 기후위기의 첫번째 얼굴은 위기를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극렬하게 맞닥뜨리는 이들이다.
다른 한 편 기후위기를 가장 선명하게 마주하는 존재들이 있다면 농작물이다. 인간들도 적응하기 어려운 변화 앞에 식물들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만다. 그것은 다름아닌 우리의 식량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작물 곁에 언제나 농민들이 있다.
영화는 기계화된 농업 대신 맨 손으로 흙을 매만져 땅을 일구는 여성농민들을 비춘다. 해녀들이 바다의 아픔을 가장 먼저 알아차리듯 여성농민들은 땅의 아픔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다. 쏟아지는 폭우에 떠내려가는 양파들을 무너지는 마음으로 지켜냈다는 한 농민의 애닳은 발언에서 서러움과 투지를 마주한다.
영화 속에서 김정열 농부는 말한다. 만약 지구를 식힐 수 있다면 그 시작은 마침내 여성농민들로부터 올 것이라고. 기후위기의 두번째 얼굴은 땅을 닮은 방식으로 땅을 일궈내는 이들이다.
환경운동가들은 때때로 ‘급진적’이라 불리운다. 환경운동가들만큼 평화적인 이들이 또 있으랴 싶지만, 비가시화된 고통을 상기시키는 이들에 대한 대중의 냉담한 시선 역시 그럴 듯 싶다. 또 한 가지 ‘급진적’인 이유가 있다면 자본주의 시대에서 자본의 논리를 따르지 않는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국내에서는 ‘친환경’을 선포하고서 자본의 논리에 따라 외국에 석탄발전소를 수출하겠다는 대기업 두산에 정면으로 맞선 이들이 있었다. 청년긴급기후행동 활동가들이다. 그들은 두산의 행태를 고발하며 녹색 수성 스프레이를 사옥 조형물에 분사했다. 두산은, 두 명의 청년들에게 ‘기물손괴’죄로 2천여 만원의 소송을 제기한다.
그들을 응원하는 수많은 시민들과 함께 긴 투쟁을 이어간 끝에, 법원은 청년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청년활동가들을 응원하는 시니어 활동가들이 있었다. 손주들을 떠올리며 활동을 시작했다는 60+기후행동 활동가들이다. 피켓의 문구가 마음을 울린다.
“너희가 옳다 고맙다 사랑해”
우리는 그렇게 연결된다. 수고했다고, 그동안 고생이 많았다고, 이렇게 함께 해줘서 고맙다고, 앞으로도 함께 가자고, 따뜻하게 마주치는 눈빛 속에 여러 말들이 오간다. 스크린 밖의 관객석까지 연대의 감각으로 물든다. 기후위기의 마지막 얼굴은, 기후위기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맞서 싸우는 활동가들이다.
바로, 지금, 여기 한국의 이야기이다. 당신의 얼굴은 어떤 이들과 닮아있는가? 그리고 또 어떤 이들과 함께 하고 싶은가. 원하지 않더라도 위기는 점점 더 가까워 올 것이고, 역시 원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어떤 얼굴들을 더 가까이서 마주해야 할 것이다.
겁이 날 지도 모르겠다. 허나 실상 당신과 같은 얼굴들이다.
우리, 고개를 들어 얼굴을 마주하고 서로와 눈을 맞추자.
오늘, 아니 내일을 위하여!
2024년 5월부터 공동체 상영이 가능하며, 더 자세한 정보는 홈페이지(https://allthatsavesus.kr/about)에서 확인할 수 있다. 척박한 땅에서 틈새를 비집고 올라오는 씨앗을, 저 먼 곳까지 퍼트리는 바람이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