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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정 May 19. 2024

[영화 리뷰] 순환, 중요한건 순환이야.

하마구치 류스케 화제의 신작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얼마 전, 또 한 번의 국회의원 선거가 끝이 났다. 주민들의 표를 하나라도 더 얻으려, 전국 곳곳에는 ‘개발’ 뿐인 선거 현수막들이 경쟁하듯 펄럭였다. 그게 얼마나 효과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건 아직까지 ‘개발’은 힘이 있다는 것이다. 그 힘은 물론 자본을 가진 자와 가지려고 하는 자들에게 크게 기대있다.


개발과 보존의 대립은 아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녹색성장’ 따위의 구호가 논점을 흐리게도 하지만 두 입장의 충돌을 보고 있노라면 그 ‘협상’은 어떤 갈등보다도 요원해보인다. 개발을 하겠다는 입장에서 지역사회에 막대한 이윤을 창출할(것이라 믿어지는) 개발을 포기할 이유가 조금도 없는 반면, 보존을 해야한다는 입장에서는 한낱 돈벌이보다 훨씬 더 중요한 환경적 가치들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대립구도가 우리에게 너무 익숙한 탓일까? 자연을 지키려는 이들은 자본과 가장 먼 곳에 있을 ‘순수성’과 손쉽게 밀착되고, 동시에 그 반작용처럼 개발을 외치는 이들은 종종 ‘악’으로 치부된다. 순수하고 평범한 존재들을 위협하며 외부에서 음습하는 악의 존재, 단순하고 명료한 서사에 그 해법 역시 명확하게 다가온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러한 개발과 보존의 대립구도를 그리는 듯 보이지만 그 이분법적 구도를 전면으로 부정하고 있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극영화로서는 희소하게 선언적으로 내세운 제목이 궁금함을 자아낸다.


이야기는 개발이 되지 않은 작은 산골 마을에 도시에서 온 이들(‘타카하시’와 ‘마유즈미’)이 글램핑장을 짓겠다며 주민 설명회를 열면서 시작된다.


영화의 도입부, 옅은 하늘빛을 오래도록 비추던 카메라가 푸른 계통의 옷을 입은 주민들을 비추고, 도시에서 온 자(‘타카하시’)가 그와 대조되는 선연한 주황빛의 외투를 입고 있는 것을 보면 이들이 그곳에서 이질적 존재임은 분명해보인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악’이 아닌가? 선과 악이라는 분명한 이분법적 구조에 그들을 대입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카메라는 개발하려는 이들을 맹목적으로 그려내는 대신 그들 개개인에게 맥락을 부여한다. 단순히 서사가 드러나는 것을 넘어 그들이 자신의 입으로 이야기를 들려주는 단독 시퀀스가 존재한다.


그들은 마을 주민들에게 정중한 태도를 취하고, 마을 주민들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고서 도시로 돌아가 사업을 멈춰야 한다고 설득하기도 한다. 특히 ‘타카하시’는 글램핑장을 기회삼아 마을로 이주하고 싶은 마음을 내비추기도 한다. 이를 ‘악’의 모습이라고 바라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그와 반대로 마을의 심부름꾼 노릇을 자처하는 ‘타쿠미’는 외부인들에게 연신 반말을 해대고, 마을의 깨끗한 물로 우동을 만들고 싶어 식당을 열었다는 마을주민은 스스로를 ‘외부인’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개발함으로써 특별히 자신의 이익을 취하는 것이 아닌 ‘외부인들’이 진정 악인가? 자신의 이익을 취하기 위해 마을에 자리잡은 주민은 그렇다면 선인가? 그 경계는 점점 더 모호해진다.


이러한 영화의 설정들은 자연을 바라보는 세계관에서 이분법적 구도가 가지는 맹점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그 대신, 순환과 같은 자연의 순리에 대해 은은하게 메세지를 던져낸다. 인류의 역사에서 제 몸 하나 지키기 힘든 나약한 인류는 늘 필연적으로 자연으로부터 무언가 얻어야 했지만, 똑같이 이익을 취하더라도 ‘우동가게 주인’과 ‘외부인들’의 태도는 전혀 같지 않다.

좋은 물이 결국 우리 입에 맞는 좋은 음식을 만든다고 믿는 ‘우동가게 주인’은 오히려 자연의 품 안에서 그 가치를 알고 지키려는 이이다. 설사 깨끗한 물이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일지라도 그 가치를 어느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반대로 ‘외부인들’은 아름다운 자연을 선망하고 있지만 대상화된 가치만을 인식할 뿐 자연의 내재적 가치를 알지 못하는 이들이다. 글램핑장이 지어지면 흘러나올 오수를 ‘그정도는 괜찮다’며 내버려둘 수 있는 건 바로 그 때문이다.       

‘타쿠미’의 딸 ‘하나’가 숲으로 가는 길, 소들이 있는 우사를 지나는 장면이 나온다. 우사에는 소들의 배설물이 한켠에서 모락모락 김을 뿜어내고 있다. 인간들은 온통 외투로 겉을 에워쌀 만큼 추운 날씨이지만 배설물들은 아랑곳 않고 생의 기운을 강렬하게 발산한다. 그리고나서 장면이 전환되는 곳은 다름아닌 우동가게 주방이다. 마을의 좋은 물로 만들어진 우동이 냄비 속에서 한소끔 끓어오르며 따끈한 김을 내뿜고 있다.

바로 순환이다. 소가 건초를 먹고, 소가 배변을 하고, 그 변들이 어딘가에서 거름이 되고, 비옥한 토양은 다시 맑은 물을 만들어내고, 물은 다시 먹을거리를 만들고, 인간은 그 힘으로 삶을 일궈내고. 순환하는 자연의 이치가 바로 이 곳에 있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물 역시 같은 맥락에서 지극히 자연스러운 흐름 속에 있다.


‘타쿠미’와 글램핑장에 관해 이야기하던 ‘마유즈미’가 말한다. 사슴들이 인간에게 가까이 오지 않는다면 글램핑장의 손님들 역시 다칠 일이 없으니 모두가 괜찮은게 아니냐고. 그러자 ‘타쿠미’가 읊조리듯 반문한다.  “그럼 사슴은 어디로 갈까?”


그곳은 본래 사슴들의 집이고 길이었다. 영화의 결말은 다소 충격적일 수 있지만 그 역시 자연을 단순히 ‘순수성’에 묶어두는 관점에 반격하며 본디 자연이 그럴 뿐이라고 일갈하는 듯 하다.

영화에서 타쿠미가 말한다. “중요한건 균형이야. 정도가 지나치면 균형이 깨지고 말아.” 개발과 보존의 이분법적 구도에서 ‘균형’이란 ‘적당한 개발’ 쯤의 타협으로 여겨지기 쉽다.

그러나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보다 ‘자연스러움’을 아는 마음이 아닐까?


마을의 물을 긷고 나무를 땔감으로 이용하더라도 본디 그러한 것이 계속해서 그러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 자연의 품 안에서야 살아갈 수 있는 존재로서 그 자연스러움이 훼손되지 않도록 지키는 이들의 마음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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