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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진 Dec 18. 2023

<나폴레옹>, 21세기 영국인이 보내는 조롱

영화 <나폴레옹> 리뷰

영화는 1793년 프랑스혁명으로 시작한다. 코르시카 출신 장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혼란스러운 국가 정세 속에서 영웅으로 떠오른다. 한편 나폴레옹은 사교 파티에서 운명의 연인 조제핀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듭한 나폴레옹은 영웅으로 추대되고, 마침내 스스로 황제 자리에 오른다.


ⓒ소니픽처스


전기(傳記)영화는 서사가 정해져 있음에도 감독의 연출에 따라 인물이 다르게 묘사된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펜하이머>처럼 역사 이면에 감춰진 인물의 감정을 조명하기도 하고, 안중근 의사의 이야기를 다룬 <영웅>처럼 역사를 왜곡하며 신파의 소재로 전락시키기도 한다.  리들리 스콧은 영국인의 억하심정을 영화에 심기로 작정한 듯 나폴레옹을 깎아내린다.


영화는 나폴레옹에게 일말의 존중도 표하지 않는다. 정확히는 영화 내내 단 한순간도 나폴레옹을 멋지게 연출하지 않았다. 영국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는 첫 전투에서도, 황제로 즉위하는 순간에도, 귀양지 엘바섬에서 탈출해 병사들의 신임을 얻는 순간에도, 마지막 워털루전투에서도. 영화는 쉬지 않고 나폴레옹을 조롱한다. 말에 오르는 것도 잘 못해 부관의 도움을 받고, 그나마 한 번에 오르지도 못해 미끄러진다. 정치인 무리와 마찰을 빚을 때는 그들의 접근이 두려워 계단에서 구르기까지 한다. 조제핀과 사랑을 나누는 장면에선 막무가내로 돌진하는 짐승으로 보일 뿐이다.


ⓒ소니픽처스


영화에서 조제핀은 끊임없이 나폴레옹을 뒤흔드는 인물로 묘사된다. 일각에선 나폴레옹와 조제핀의 사랑에 초점을 두고 제작한 영화라는 시각도 있는데, 그다지 동의하진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배경에 서정적 선율의 음악이 흘렀을 것이다. 그 음악이 낭만적이든 애처롭든 말이다. 이처럼 사운드도 조롱에 힘을 더한다. 전투 장면마다 나폴레옹의 긴장 가득한 숨소리를 의도적으로 크게 들리도록 믹싱한 것도 그렇다. 나폴레옹이 지휘하는 프랑스 군대가 전투에서 승기를 잡는 장면에서는 저음역대의 어두운 음악을 삽입했는데, 이는 프랑스 군대를 마치 ‘빌런’ 집단으로 느끼게 한다.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는 좋았다. 감독의 의도대로 나폴레옹을 찌질하고 가벼운 인간으로 잘 묘사했다. 대체로 영화 <그녀> 속 미약한 모습을 연상케 한다. 바네사 커비는 그가 아닌 조세핀을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 좋은 연기를 선보였다. 특유의 저음역 목소리로 조세핀을 마성의 매력을 지닌 인물로 묘사했다.


ⓒ소니픽처스


나폴레옹의 생애에 대해 자세히 아는 것도 아니고, 그를 존경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영화를 본 후에는 묘한 불쾌함이 남는다. 아마도 위인으로 알던 인물을 향한 조롱을 마주한 반감 때문이 아닐까. 그럼에도 ‘나폴레옹’이라는 제목으로 이토록 명백한 조롱을 담을 이유가 있었는지 여전히 의문이다. 리들리 스콧이 영국인이라는 점을 새삼 주목하게 만드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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