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티티 프레자일. Anti ti ti ti fragile fragile"
요즘 나에게 수능 금지곡처럼 눈에, 입에 박히는 노래가 있다. 르세라핌의 <antifragile>. 우리 딸도 어디서 노래를 들었는지 연신 ‘안티티티티티’를 부르며 엄마도 아느냐고 묻는다.
얼마 전,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에서 읽었던 기억이 있다. anti 그리고 fragile. ‘혼란과 압력이 강해지면 오히려 성과가 상승하는 성질'을 일컫는 말이다.
노래에서는 쉴 새 없이 anti-ti-ti-ti fragile을 외치고, 알통을 선보이던 뽀빠이의 전형적 포즈가 안무의 포인트다. 가사에서도 제목의 메시지가 확실히 담겨있다.
더 부어 gasoline on fire
불길 속에 다시 날아 rising
무시 마 내가 걸어온 커리어 I go to ride till I die die.
더 높이 가줄게 내가 바랐던 세계 젤 위에
떨어져도 돼. I'm antifragile antifragile.
퇴사를 하고 나면, 하루를 어떻게 살아야지 생각해본 적은 없다. 온전히 나의 의지로 (딸아이의 하교시간에 맞춰..) 하루를 설계해야 하니, 막연히 ‘생산적으로’ 시간을 쓰자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참 어렵다. 매일 주룩주룩 체크해가던 To Do List의 줄들은 확연히 줄었다. 아무리 출근이 바빠도 아침에 써 내려가던 일기는 뜸해진다. 이렇게 하루가 가는 게 억울해서 읽어 내려가던 책들도 속도가 더뎌졌고, 일주일에 한 번은 꼭 이 울분과 영감들을 남기겠다던 주 1회 글쓰기 약속 또한 잘 지켜지지 않는다.
삶이 너무 안락하면 글을 쓸 이유가 없고,
너무 고단하면 여력이 없다.
문득 생각한다. 나는 외부의 압력이 필요한가? 안락함이 오히려 내게 독이 되는 걸까? 삶의 치열함과 바쁨. 쉴 새 없이 써 내려가는 To do List. 나를 열받게 하는 누군가가 있어야 보란 듯이 더 멋진 결과를 내는 antifragile의 성질을 가진 사람인가?
그리고 또 문득 생각한다. 이거 혹시 노예근성 아닐까? 감시자가 있어야만 하는, 시켜야만 하는, 자유가 오히려 더 불안한. 그런 성질.
그럴 듯 해 보이는, 그리고 부정하고 싶은 한 끗 차이로 다른 두 가지의 성질이 내 DNA에서 보란 듯이 움직이고 있다.
정밀검사를 해도 나오지 않을 내 DNA를 뒤지고, 생각으로 가득 찬 뇌를 헤집고 다니다 보니 벌써 주말이 다 갔다. 혼란과 압박을 즐기는 나인지, 혹은 자유를 주체적으로 누릴 노예근성을 버려야 하는 나인지는 일단 뭐라도 써 보며 생각해보기로 한다. 잘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