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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리 Feb 05. 2023

엄마와 아빠의 일요일

   일요일 밤 9시. 딸아이와 거실 책상에 나란히 앉았다. 아이는 내일 가야 하는 영어, 수학학원의 숙제를 하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밀린 숙제다. 매일매일 했어야 하는 숙제들이 차곡차곡 밀렸다. 매일 딸이 주어진 숙제를 할 수 있게 응원하고, 독려하고, 다그쳐야 하는 게 내 몫이라면, 이번 주는 내 역할을 다 하지 못했다. 대신 우리에겐 주말이 있었다. 모처럼 토요일, 일요일에 큰 계획 없이 집에서 보내기로 했다. 조금씩 밀린 숙제를 하다 보면 될 거라 믿었다.


  하지만 나는 복병을 잊고 있었다. 흘러가는 시간을 어떻게든 쪼개어 보고 싶어 하는 J엄마에게는, 그저 자신만의 계획만 있을 뿐 딸의 계획, 특히나 공부 같은 것에는 관심도 없는 J인 듯 P형 같은 아빠가 있었다. J엄마가 그려놓은 밀린 숙제를 조금씩 해나가겠다는 그림은 P형 아빠가 깡그리 덧칠해 두었다.

  엄마와 아빠는 일요일을 대하는 마음가짐도 달랐다. 엄마는 일요일은 일주일을 마무리하는 시간이라 여겼고, 일요일 저녁에는 집에서 간단히 식사를 마무리하며 9시면 조명등을 제외한 모든 불들을 소등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빠는 그런 생각은 없다. 그저 오늘은 오늘인 것이다.

  

 우리는 딸의 고모, 나의 형님, 남편의 누나 식구가 같은 아파트에 산다. 가까이에 살면서 고모댁과는 크고 작은 교류가 많다. 맛있는 것이 생기면 나눠주고, 가끔 아니 자주 식사를 한다. 그 집도 딸 하나, 우리도 딸 하나다 보니 둘이 잘 논다. 나 역시 언니 같은 형님이 좋다. 동생처럼 챙겨주시니 늘 고마운 마음이다. 다만 만남의 빈도 수가 많아질수록 싫은 점도 생기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내겐 시댁식구이다 보니, 말 한마디가 그리 편하지만은 않았고, 늘 같은 이야기가 반복되는 것도 썩 재밌지만은 않았고, 내게는 늘 착하게 웃고만 있어야 하는 조금은 불편한 자리였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싫은 건 남편의 모습이다. 언니와 노느라 놀아달라고 보채는 딸도 없고, 술 잘 마시는 매형과 누나가 있으니 쉬지 않고 술이 들어간다. 그리고 '여긴 내 구역이다. 믿는 구석이 생겼다'라는 부질없는 생각으로 평소 내게 쌓아왔던 불만들을 꼭 여기서 술주정 해댄다. (다행히 형님댁은 늘 내 편을 들어주신다.)

 

  일요일 오후 4시. 고모네집 매형의 전화가 왔다. 싸늘하고 불길했다. 설마 하고 수화기 너머의 소리에 집중했다. '냉삼겹살' '소주 한 잔' '저녁' 등 나의 평화로운 일요일을 깨는 전화가 분명했다. 요즈음은 그렇지 않아도 늘 반갑지만은 않은 고모댁과의 식사인 데다가, 그것도 일요일 저녁이다. 해맑은 매형은 5시에 동네에 새로 생긴 냉삼겹살 집에서 소주 한잔 하자고 한다. 한층 더 해맑은 남편은 딸에게 "오예! 냉삼겹살 먹자! 고모부가 사준대!"라고 외친다. 환호성을 지르는 둘 사이로 냉정하고 싶던 나의 마음은 요동친다. "왜! 빨리 먹고 들어오면 되잖아"라고 눈치를 살핀다. 영 내키지 않는다. 해맑게 육성을 내뱉는 딸에게 애써 웃으며 "엄마는 다이어트 중이라 못 갈 것 같아. 아빠랑 갔다 와"라고 영혼 없이 말한다. 그런 줄만 아는 둘은 유쾌하게 냉삼겹을 먹으러 나갔다.


  본디 내게 일요일은 어제까지의 6일을 마무리하고, 또 다가올 6일을 준비하는 고요하고도 매우 뚜렷한 시간이다. 하지만 남편에게는 '개와 늑대의 시간'이다. 이걸 시작으로 둬야 할지, 마무리로 둬야 할지 애매모호한 이 경계를 구분할 마음조차 없을 것이다.


 5시에 나갔으니, 7시면 들어오리라 믿었다. 계속 내 마음속에는 딸아이가 미뤄둔 일주일 치의 숙제가 맘에 걸린다. 해야 할 것들을 적어보며, 차곡차곡 순서대로 책을 쌓아 올리며 애꿎은 시계만 째려본다. 8시가 다 되었다. 벌써 3시간째. 안 봐도 보인다. 신나게 부어라 마셔라 하고 있을 애 아빠의 모습이. 개인지 늑대인지 구분하지도, 구분할 마음도 없는 모습으로 말이다.


 8시 30분이 넘어서 딸과 남편이 집으로 들어온다. 눈은 풀렸고, 배는 빵빵하다. 내가 술에 취하지 않는 이상, 술 취한 그 어떤 자와도 말을 섞지 않겠다는 신념을 끌어당겨, 상황을 외면한다. 다만 딸아이에게 숙제에 대해 차근차근 이야기를 건넨다. "오늘 네가 놀면서 하지 않은 숙제가 이만큼이야. 어쩌면 좋을까?" 내가 생각해도 짜증 나고, 무서운 엄마의 말투이다. 후다닥 손을 씻고 책상에 앉은 아이가 안쓰럽다. 저 피하고 싶은 자는 "숙제 그거 안 하면 어때? 그냥 하지 마"라고 말한다. 다시 한번 내 신념을 다잡는다. ‘술 취한 어떤 자와도 말을 섞지 않는다' '술 취한 저 X소리는 듣지 않는다'


 서둘러 아이는 숙제를 한다. 안쓰럽고 미안하고, 이제 2학년이 되는 아이에게 숙제는 무슨 의미일까? 머릿속에는 여러 가지 생각들이 오가지만, 이 지독한 J엄마는 이 엉망이 되어버린 일요일의 시간이 짜증스럽기만 하다.

  9시가 넘었다. 저 남편님은 코를 골며 잠이 들었다. 여전히 우리는 거실에 앉아 숙제를 한다. 미칠 듯한 짜증을 어떻게 풀까.. 하다 아이의 옆에 앉아 타자를 두드린다. 10시가 되었다. 아직 아이의 숙제는 끝이 나질 않는다. 나의 타자도 끝이 나지 않는다. 저분의 코 고는 소리는 클라이맥스를 향해 간다. 엄마와 아빠의 이렇게나 다른 일요일이 이렇게 흘러간다. 쓰다 보니 한결 투명해지니 그나마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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