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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리 Feb 04. 2024

당신에게 '그림'은 무엇인가요?

  딸아이는 7살 가을부터 첼로를 시작했다. 첼로를 배운 지 약 2년 반 정도가 흘렀다. 조그마한 손으로 단단한 줄을 타고, 몸집만 한 악기에서 소리를 내는 모습을 보면, 나도 모르게 감동적이고, 또 울컥할 때가 있다. 

늘 그렇듯 처음은 즐겁다. 나비야를 시작으로 반짝반짝 작은 별을 연주할 때는 앞으로 펼쳐질 고난의 악보를 절대 알지 못한다. 이제 조금씩 긴 클래식과 빠르게 돌아가는 메트로놈의 박자를 쫓아가는 게 서서히 버거워지는 시점이다. 

처음엔 정말 열심히 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을 연주하며 즐거워하던 아이는 이제 조금씩 꾀를 부리기 시작한다. 틀린 부분을 구렁이 담 넘어가듯 넘어가고, 박자를 무시하며 마음 놓고 연주할 때도 있다. 그러다 어려운 부분이 마음에 걸렸는지, 하다가도 정말 어렵다며 울기도 한다. 세상엔 재미있는 것들이 널렸다는 걸 알고,  커져가는 머리가 만드는 세상에 즐거움만 채우고 싶은 그런 나이가 됐다. 


 아이의 여러 상황을 지켜보다 아이에게 물었다. 

"첼로 어렵지?"

"응..... 예전보다 정말 어려워. 팔도 많이 아파"

"그렇지.. 세상에 쉬운 일이 없지. 그래도 이렇게는 안돼. 연습하지 않고 노력하지 않고 힘들다고 투정만 해서는 안돼"

"....."

"첼로가 재미없어? 하기 싫은 거야?"


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왜 나는 차분하게 아이의 마음을 들어주지 못하는 걸까. 하긴, 그래도 참고 아주 차분하게 말한 편이다. 사실 '이럴 거면 때려치워! 첼로 갖다 버린다. 비싼 레슨비 그냥 나오는 줄 알아!!!!' 속으로 여러 번 외쳤다. 


"아니, 나 첼로 좋아. 재밌어. 즐거워"

"근데 왜 요즘 열심히 안 해? 왜 연습하면서 자주 짜증 내?"

"...... 좀 그러면 안돼?"

"........................"


그렇다. 나는 좀 그러면 안 될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다. 



열심히 노력하다가 갑자기 나태해지고
잘 참다가 조급해지고,
희망에 부풀었다가 절망에 빠지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
그래도 계속 노력하면
수채화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겠지.
그게 쉬운 일이었다면,
그 속에서 아무런 즐거움을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계속 그림을 그려야겠다. 
-고흐가 테오에게 쓴 편지 中에서



 문득, 고흐가 그토록 힘들어하고 즐거워하고 감정의 널뛰기를 해대는 그림 같은 존재는 내게 무엇인지를 생각해 본다. 먼저 영어가 떠오른다. 어렸을 적 BackstreetBoys의 가사를 노트에 적어가며, 이 모든 걸 영어사전을 찾아보지 않아도 알고 싶었던 그 열망. 외국 사람들과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소통하고 싶었던 간절함. 열심히 혀를 굴리다가도, 어려운 단어 앞에 절망하고. 또 그러다가 영어가 들리면 기특하다가도, 버벅대는 나를 발견하면 절망에 빠지고. 그럼에도 밤이면 테일러 스위프트의 영상을 보며 따라 하고 흉내 내는 그 즐거움. 언젠가 네이티브처럼 외국에서 살아보겠다는 설렘으로 계속 쥐고 있는 이 죽일 놈의 내 사랑 영어. 


 두 번째는 글쓰기. 미친듯한 노력을 퍼붓다가도, 막상 빈 종이에 들어서면 다리가 후들거리는 나 자신을 발견하는 그 시간. 그분이 오신 것처럼 타자가 빨라지는 경지에 이르렀을 땐, 마치 내가 작가가 된 것 같다가도 말도 안 되는 문장의 향연을 다시 바라보노라면, 또 절망에 빠지고 분노하고, 원망하는 이 지리멸렬한 반복의 굴레. 그럼에도 뭐든 쓰고 싶고, 쓰고 나면 마음이 후련해지는, 또 쌓여가는 글들을 보면서 내 지나온 시간들이 헛되지 않았구나, 뭐 그런 값비싼 위안을 주는 나의 글쓰기. 


그리고 육아. 좋은 엄마가 되어 보겠다며 육아서에 미친 듯이 줄을 쳐가고, 여러 상황들을 혼자 시뮬레이션해보며 잘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 부풀다가도, 예상 밖에 빗나가는 상황들이 부딪힐 때 나오는, 분노의 샤우팅에 좌절하는 내 아이를 기르는 시간. 미칠 듯 힘들었다가도 아이의 작은 말 한마디에, 자는 모습에 행복을 찾는 하루에도 몇 번을 롤러코스터 타는 육아. 


이렇게 적다 보니, 고흐가 그렇게도 힘들었지만 큰 의미 있었던 그림이 내게 참 많이 있구나 싶다. 좀 짜증 내고, 힘들다고 투정 부려도, 그 속에서 즐거움을 찾으며 계속 첼로를 켜는 딸아이. 좀 그러면 안 되냐고 묻던 아이의 물음표가 내게 느낌표가 되어 다가온다. 

어쩌면 그냥 지금 내가 하루에도 몇 번을 흔들리고, 다 잡고 하는 이 일상이, 이 인생이, 빈 도화지 위에 그려나가는 그림이구나 싶다. 그러니 나는 그냥 인생을 지금처럼, 천천히, 또 꾸준히 살아나가야겠다.


불렛저널에 적어본 나의 오늘 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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