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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그라미 Dec 05. 2022

아지


“네가 편안해졌으면 한다. 네가 있어서 그동안 많이 웃었다. 가끔은 네가 아파 속상하고, 저지리를 해놓아 짜증도 났지만 그보다는 즐거운 일이 훨씬 많았다. 더는 힘들지 않기를 바란다.”

사흘 전부터 집안 곳곳에 설사 자국이 보였다. 화장실 문이 닫혔다거나 가끔 꾸중을 심하게 하면 스트레스로 인해 대소변을 가리지 못한 적은 있었다. 이렇게 중구난방 식으로 실례를 한 경우는 이례적이다. 밥그릇에 전혀 입을 대지 않았다. 마냥 좋아하던 고기 간식도 거부했다. 꼼짝도 안 하고 누워만 있다. 껴안으니 축 늘어진다. 감은 눈을 손가락으로 살짝 벌려보니 눈동자가 멀거니 풀렸다.


-식구 되다

15여 년 전에 작은아이가 비쩍 마른 강아지를 껴안고 왔다. 작은애의 친구가 기르던 강아지인데 아버지가 갖다 버리라고 한다면서, 어떡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작은아이한테 떠안기더란다.

구석에 처박혀 바들바들 떨고 있는 강아지는 사람 눈치를 살피며 경계했다. 도저히 정이 가지 않았다. 도로 친구한테 갖다 주라고 했다. 작은아이는 평일에는 개를 데려다줄 시간이 없으니 휴일이 될 때까지 며칠만 기다려 달란다.

한집에 있으니 신경이 쓰인다. 밥은 줘야 할 게 아닌가. 사시나무 떨듯 하는 강아지가 배가 고픈지 밥그릇에 다가온다. 세상에나, 저 조그만 녀석이 제법 많은 양의 밥을, 밥 한 톨 남김없이 싹싹 핥아 먹는다. 뭐든 잘 먹는다. 김치 쪼가리며 된장 찌꺼기까지도 먹어 치우고, 과일도 잘 먹었다. “어이, 벌벌아. 이것 먹어라.” 먹을 것을 주면 벌벌 떨면서 조심스레 다가왔다.

휴일이 되자 작은아이가 강아지를 챙겼다. 친구가 개를 키울 다른 사람을 구해야 한다며 걱정을 하더란다. 작은아이는 저렇게 겁 많고 붙임성 없는 강아지가 다른 데 가서 잘 살지 모르겠다며 안쓰러워한다. 눈을 질근 감았다. 우리와는 인연이 없는 강아지라며 외면했다.

떠나는 강아지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며 먹을 것을 주고 쓰다듬어 주었다. “어디에 가든 잘살아라.” 그런데 빤히 바라본다. 며칠 사이에 살이 올랐나 보다. 꾀죄죄하던 몰골이 촌티를 벗었다. 하얀 털로 덮인 얼굴에 까만 눈동자가 포도알처럼 반짝인다.

“눈빛이 너무 가련하네.” 한참을 바라보던 남편이 입을 뗀다. 보면 볼수록 눈빛이 애처롭고 청순하단다. 남편은 차마 저 여린 것을 보낼 수가 없다면서 개를 덥석 껴안았다. 그동안 다섯 차례나 주인이 바뀌었단다. 저런 상태로 여기저기 옮겨 다니니 어여뻐 보이지 않았을 테고, 구박을 받다 보니 불안했을 것이다. 바들바들 떠는 것은 겁이 나다 보니 보이는 행동이지 싶었다.

강아지는 우리 집 식구가 되었다. 온 식구가 어여뻐 해도 여전히 벌벌 떠는 것은 고쳐지지 않았다. 이름을 ‘강아지’에서 ‘강’ 자를 떼고 ‘아지’로 불렀다. 슈나우저와 말티즈의 반종인 아지는 하얀 털옷을 입은 수수한 암캐로 작은아이 방을 제방인 양 보금자리를 틀었다. 다른 데서 얼마나 지내다 왔는지는 모른다. 화장실을 찾아가 대소변을 가리는 것을 보면 제대로 교육받은 개였다.

아지는 우리 식구들에게 웃음을 주었다. 먹을 상을 너무 밝혀 얄미울 때도 있으나 현관문이 열고 닫힐 때마다 문지기 역할을 충실히 했다. 꼬리를 흔들며 스스로 예쁜 짓을 했다. 아지의 정확한 나이는 모른다. 우리 집에 온 지가 한참이니 나이가 제법 들었다는 것을 짐작할 뿐이다.


-관계 맺다

작은아이는 아지를 끔찍하게 돌보았다. 침대에서 같이 잠을 잤다. 집안에서는 껌딱지처럼 붙어 다니는, 일명 ‘한 조’였다. 심한 사춘기를 거쳐 가는 단계에서 아지를 기른 게 어쩌면 다행이었는지도 모른다. 아지와 대화하고, 외출하고, 그야말로 절친한 친구였다.

아지 역시 작은아이가 귀가할 시간쯤이면 현관문 앞에서 무한정 기다렸다. 어떻게 시간 개념을 알고 있을까. 보는 식구들도 고개를 갸웃거릴 정도였다. 행여 작은아이가 장거리 출타로 집에 오지 않는 날은 보는 이들이 애가 쓰였다. 아무리 방에 들여놓아도 어느새 현관 앞에 나와 앉아 있었다. 언젠가 작은아이가 직장 때문에 근 1년간 집을 떠나자 아지는 병을 앓았다. 약을 먹이고 아껴주어도 속수무책이었다. 그때 개에게도 우울증이 생긴다는 것을 알았다.

아지는 작은아이를 지키는 충견이었다. 주인이 침대에 누워있을 때는 그 누구도 방문을 여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난리도 그런 난리는 없다. 얼마나 짖어대는지 시끄러워서도 문을 닫는다. 허투라도 작은아이를 툭툭 치면 으르릉거리며 달려들었다.

작은아이는 나이 든 아지에게 부쩍 신경을 썼다. 이빨이 빠지자 습식사료를 먹이고, 아파트 한 바퀴 도는 것도 힘들어한다며 가벼운 산책 정도로 바람을 쐬여주었다. 동물병원에 갖다 주는 돈도 만만찮다고 잔소리하면 ‘아지에 대해서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라며 말을 잘랐다.


-자리에 눕다

작은아이가 친지 댁에 놀러 간다고 날짜를 잡아 놓았다. 그런데 아지가 아프다 보니 밤새 돌보느라 잠을 설치고, 눈은 벌겋게 부어 눈물이 그렁그렁 달려 있다. 아지 곁에 있겠다는 것을 등 떼밀었다. “아지는 늙었단다. 나이 들어 아프거나 병을 앓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야.”

아이를 친지 집에 보내고 인터넷 검색에 들어갔다. 개가 명이 다하면 먹을 것을 거부하고, 물마저 끊고 나서 며칠 후에 눈을 감는다고 한다. 아지는 유선종양이 있다. 임신한 적이 없으니 새끼를 낳아보지 않았다. 언젠가 어미 잃은 들고양이 새끼를 집에 데리고 왔는데 처녀인 아지가 젖을 물리고 있었다. 고양이가 어찌나 세게 빨았는지 젖에 피멍이 들었다. 안쓰러워 고양이를 떼려 하자 으르렁거리며 근접을 못 하게 했다. 가끔 발정을 내고, 상상임신을 하였는지 젖이 나오기도 했다. 그런 아지가 고양이를 품은 모습을 보니 애틋하다 못해 마음이 아렸다.

어느 날부터 아지 젖에 망울이 생기기 시작했다. 고약을 사서 바르고, 붕대를 감아주기도 했으나 낫기는커녕 점점 더 망울이 커졌다. 작년에 작은아이가 동물병원에 데리고 가서 수술 문의를 했다. 애완동물은 보험이 없으니 금액이 만만찮았다. 수의사는 나이 든 개일수록 자칫 마취에서 깨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며 수술을 권유하지 않았다. 개가 추위를 많이 타는 것 같으니 따뜻하게 보살펴주라고 하더란다.

더러 애완견을 두고 폄훼하는 사람도 있다마는 한 집에서 십수 년을 살아보면 단순히 ‘개’라고만 말할 수는 없다. 개를 들일 때는 당연히 애완동물로만 생각했다. 그러나 말귀 알아듣고, 눈치 빠르고, 주인을 잘 따르고, 덤으로 웃음까지 안겨 주는 아지를 보며 마음이 흔들렸다. 애완동물 그 이상으로는 생각지 말자고 무수히 선을 그었으나 어느 사이엔가 아지는 가족 울타리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아지를 보듬었다. 이제 가야 할 때가 되었다면 보내주어야지. 병이 없었더라면 좋았을 테지만 한두 가지 병을 앓았다고 해서 꼭 불행한 것도 아니다. 이 또한 육체적 쇠퇴의 한 과정이지 않은가.


-현실을 보다

세상에는 여러 사례의 개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주인의 목숨을 살린 오수의 개, 만화 속의 스누피, 동화에 나오는 플란다스의 파트라슈, 주인의 묘지를 9년간 지키다 숨진 아르헨티나의 콜리, 충견 하치…. 주인을 위해 길 안내를 하고 심부름을 하는 명견은 아니더라도, 아지는 작은아이에겐 충견이고, 우리에겐 귀염둥이였다.

아지는 며칠 사이에 제 몸도 가누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작은아이는 이 모습을 언제까지 지켜보아야 하나. 어차피 가야 한다면 고통이라도 줄여주고 싶은 마음이다. 아지를 꼭 껴안았다. “아지야, 많이 힘들지?” 아지는 미약하게 숨을 쉬다가 한 차례씩 탁한 쇳소리로 숨을 몰아쉬었다. 그렇게 밤을 꼬박 지새웠다.

날이 밝자 작은아이에게 톡을 보냈다. ‘아지를 편하게 보내주자. 수의사 소견에 따라 안락사를 허용한다고 한다. 우리는 아지를 많이 사랑했잖아, 고통을 줄여주는 것도 어쩌면 한 방법이지 싶다’ 아지의 고통을 덜어주고 싶었다. 더 걱정스러운 것은 작은아이였다. 아지가 떠나는 모습을 보며 힘들어할까 봐 그게 더 신경 쓰였다. 어차피 벌어질 일이라면 나 혼자 모든 걸 수습하고 싶었다.


-사랑하다

이런저런 생각에 머리가 복잡하다. 잠시 볼일 보러 밖에 나와 있는데 작은아이한테서 동영상과 함께 톡이 뜬다. 동영상을 눌렀다. “어, 이게 무슨 일이지?” 아지가 일어나 앉아 있는 게 아닌가. 예전에 찍어놓은 동영상이 아닌가 의심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아침에 깔아준 이불이 맞다. 톡에는 단호하면서도 강한 작은아이의 마음이 적혀있었다. ‘안락사시킬 비용은 아지를 살리는 데 쓰도록 해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제 뜻을 말리지 마십시오’

아지가 일어나다니. 눈동자 초점마저도 흐릿하고 축 늘어져 있었는데 어떻게 깨어났단 말인가. 반가움에 앞서 이건 놀라움이었다. 꼭 생명줄을 놓을 것 같아 저거 주인을 친지 댁에 다녀오라고 등을 떼밀었던 것이다.

작은아이는 내가 보낸 톡을 받고 ‘엄마가 무슨 일을 결정하면 어떡하나’ 싶어 서둘러 집으로 왔단다. 급하게 아지를 부르며 빼꼼히 열린 방문을 밀쳤다. 아지는 주인 기척을 듣고는 안간힘을 쓰며 일어서려다 두 번이나 넘어지더란다. 작은아이는 그 모습에 왈칵 눈물을 쏟으며 아지를 껴안고 병원으로 내달렸다. 엑스레이 찍고, 유선종양에 소독하고, 주사 맞히고 약 받아서 왔단다. “아지, 힘내야지, 깨어나서 같이 지내야지.” 작은아이 목소리가 잠긴다. 기어코 회복시켜서 수술을 시키겠다는 작은아이의 의지가 확고했다. 작은아이와 나는 한참 동안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어쨌거나 아지는 깨어났다. 아지는 떠놓은 물을 허겁지겁 핥아 먹었다. 요양사로 있는 올케언니가 하던 말이 떠올랐다. 금방 운명하실 것 같은 어르신도 병원에 모시고 가서 주사 한 대 맞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멀쩡해지더라는.

얼마 전에 고인이 되신 선배 문인은 말씀하셨다. “사랑의 힘은 대단한 거야. 나도 병원 생활을 많이 했는데 ‘일어나세요’라고 격려의 말을 들을 때마다 그 사람을 위해서라도 병마를 이겨야겠다는 힘과 의지가 생기더라고. 내가 여태껏 병마와 싸우면서도 살아있는 것은 아마 그 덕분이 아닌가 싶어.” 살아있는 순간이 얼마나 숭고한가, 살아있는 그 순간의 명줄에 따라 현세와 내세가 가늠되는 게 아닌가. 미물일지라도 삶과 죽음의 경계선 앞에서 겸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 아지야 기운차리거라.” 내 생각이 짧았다. 배려라는 명목으로 안락사를 거론하다니. 나는 살릴 궁리가 아니라 어쩌면 죽일 궁리를 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개인적으로 안락사를 옹호했다. 생명을 도외시하자는 게 아니다. 살아서 숨만 쉬고 누워있다면 살아있은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요즘은 사후 장기기증과 연명치료 거부 서명도 더러 하고 있다. 거기에 보태 안락사도 인정해야 한다며 은연중에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데 지금, 섬찟하다. 숨 쉬는 존재를 어찌 해보겠다고 생각한 자체에 소름이 돋는다.

며칠간 앓던 아지가 눈을 뜨고 바라본다. 주사 기운인지, 사랑의 힘인지는 모르지만 이런 것을 두고 기적이라고 하지 않을까. 아지는 다시 우리 곁으로 왔다. 함께 사는 날까지 우리는 또 아지와 여러 가지 이야깃거리를 만들 것이다. 숨 쉬는 것이 삶이다. 아지와 함께하는 이 순간이 소중한 것이다.


-에필로그

아지는 병원으로 갔다. 작은아이는 유선종양 수술을 마친 아지를 회복실에 두고 집으로 왔다. 회복실에서 대여섯 시간 경과를 지켜봐야 한다며 수의사가 집에 가서 기다리라고 하더란다. 작은아이는 먹을거리를 잔뜩 사 들고 와서 쑤석거린다. 이것저것 식탁에 널어놓는 아이의 모습이 왠지 모르게 수선스럽다. 잠시도 쉬지를 않는다. 피아노를 치다가, 어깨 안마기를 돌리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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