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즈 Nov 02. 2023

낙서력과 몸무게

상승하는 것들

 

대학병원 로비에서 작은 딸의 모자 꼭지

 이른둥이로 태어난 둘째 대학병원 외래를 다녀왔다. 2.04kg으로 태어나 잠깐 1.98kg이었던 그녀는 태어난 지 75일 만에 4.6kg이 되었다. 태어난 것은 75일이지만 발달단계상 36일 정도 된 신생아다. 75일 중에 19일을 니큐NICU에 있었으니 우리가 같이 보낸 것은 57번의 밤이다. 그중에 70퍼센트는 잤고, 남은 것의 반은 울고 반은 먹었다. 어느 날은 덜 자서 더 울고, 어느 날은 더 먹고 더 게웠지만 시간은 부지런히 아이의 몸무게를 끌어올려주었다.


 대학병원 외래를 2주에 한번 꼴로 다녀왔는데 이제 두 달 뒤에 봅시다-란 말을 들으니 숨통이 트였다. 간 김에 2개월 차 접종을 맞았는데 주사 바늘이 들어가는 허벅다리가 제법 토실해서 흡족했다. 나 자신을 대신하여 아기의 삶에 집중하고 있는 내 존재 이유가 충족되고 있다. 신생아 기간에 '나'를 찾으려 들다 보면 우울이 오게 된다는 것을 나는 이미 안다. 내 몸이 내가 아니라고 신생아 돌보는 로봇이라 생각해야 여러모로 편하다.


 이제는 제법 눈을 맞추고 시선을 따라온다. 볼을 쓰다듬으면 웃는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눈을 지그시 감고는 하는데 그럴 때마다 내 피로와 예민함은 잠잠한 수면 아래로 서서히 가라앉는다. 응네-아! 응네-아! 는 배고플 때 내는 울음소리인데, 보채는 아이 곁으로 다가가서 '맘마? 맘마??' 하면 코웃음 치듯 'ㅇ헤! ㅇ헤!' 하며 눈을 여덟 팔자로 뜬다. 만들어내는 표정이 생각보다 섬세하여 보는 재미가 있다 보니 보채는 시간이 길다가 울음이 되기 일쑤다. 첫째 때와는 다르게 울음을 관찰하고 동영상 촬영도 하는 여유가 나에게도 생긴 모양이다.


-

리듬체조 슈즈를 신는 큰 딸

 천일동안 통잠을 잔 게 10번 남짓 될까? 첫째는 푹 자는 게 힘든 아가였다. 백일의 기적으로 통잠 대신 쌍꺼풀이 왔긴 하지만...... 누구나 그렇듯이 나 또한 첫째를 키울 때 울음소리에 몹시도 예민했고, 어떻게든 울음을 그치게 하려 들다 보니 체력 소모도 엄청나고 스트레스로 가득 찼다.

 우는 아이를 끌어안고 앉았다 섰다 걸었다 흔들며 몸을 움직였던 새벽이 있었다. 악다구니를 쓰는 아이를 내려놓고 절망하는 밤들이 이어졌다. 어느 날엔 아이를 남편 품에 떠넘기고 혼자 화장실로 들어가서 뺨을 연거푸 내리치다가 정신 차린 적도 있었다. 남편의 웃음소리조차 야속하고 서운하다가 폭풍 화로 뒤바뀌어 순식간에 치밀어 오르던 때. 아가에겐 사랑을 주려고 노력했다면 그 뒤에 있던 우울은 남편에게 쏟아 버리던 첫째의 신생아 시절. 해가 지는 게 너무 무섭고 싫었던 그 시간도 다 지나가고, 비명 지르듯 울던 아기는 이제 나와 손발 크기가 비슷해져가고 있었다.



낙서력 인증사진

"엄마, 오늘은 궁예에 대해 배웠어!"


 옛이야기에 관심이 있길래 신청해준 방과후 수업에서 궁예에 대해 배워왔길래 모르는 척 물어보니 열심히도 답해준다. 대답하는 게 기특하여 워크지를 보고 칭찬해 주려는데 그곳에는 아주 친숙한...... 낙서가.......

 아주 익숙한 모양이다. 누구나 한 번쯤 학창 시절에 해봤을 '대머리, 다양한 헤어스타일로 만들기'이다. 빵 터져서 깔깔 웃었더니 엄마 왜 그러냐며 다가온다. 다른 페이지를 보니 '이응(ㅇ)에 색칠하기'와 '등장 캐릭터에 말풍선을 달아 죽이거나 욕하게 하기'도 해놓았다. ㅋㅋㅋㅋㅋㅋ.



 누가 더 기막힌 아이디어로 낙서하는가로 경쟁하던 학창 시절이 떠올랐다. 국어, 국사 같은 교과서 표지를 '꿇어, 반사(심지어 반사는 내가 여러 홈페이지 가입할 때 써먹은 아이디 bansa였기도 하며, 동생은 아직 이용하고 있다)'라는 글자로 그럴싸하게 바꿔놓았던 추억도 떠올랐다. 내 아이에게도 친구와 낙서로 경쟁하며 노는 시기가 찾아온 게 신기하고, 정상적으로 자라고 있다는 확신마저 드는 것이었다. 이 소소한 것을 공유하며 함께 깔깔 웃을 수 있는 낙서력을 갖춰가는 큰 딸에게 동지감이 느껴졌다. 별 걸로 다 애정을 느낀다 싶지만 아이의 모습을 보며 내 학창 시절 기억이 떠오르는 것이 참 신기한 건 사실이다. 이것도 딸에게서 느끼는 작은 행복이라고 할 수 있을까나.

 아무튼 큰 딸의 낙서력과 작은 딸의 몸무게가 상승할수록 내 엄마력도 강해질까 의심스럽지만, 두 딸이 이렇게 저렇게 자라날수록 내 마음도 점점 부풀어 커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열심히 상승해 보자, 제군들이여!


작가의 이전글 낳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