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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박

넌 그대로여서 다행이야

by 이루고

하루 종일 누군가 머릿속에 맴돈다면 좋아한다는 것
어둠이 가득한 새벽에 떠오른다면 그리워한다는 것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생각난다면 사랑한다는 것

「 시간과 감정 / 김준 」



유리문 너머로 안경을 쓴 한 여자가 빨간 라면봉투를 계산대 위에 올려놓는다. 유리문에 다가서자 뿌옇던 '辛라면' 글자가 또렷해진다. 회색 바구니를 손에 쥐고 <오늘의 할인>이 적힌 코너를 찬찬히 들여다본다. 나란히 줄지어 서있는 과자봉지군단을 흘깃 바라본다. 어떤 관심도 없다는 듯한 눈빛 속에 미련을 가득히 숨기고 선.


저 멀리 둥글둥글한 감자와 길쭉한 고구마들이 누워있다. 그 옆에 옹기종기 섞여있는 양배추 무리. 한 손에 잡힐 만큼 작아져 버린 양배추 하나를 집는다. 초록빛깔로 물든 진열대 앞에서 한참을 서성인다. 묵직한 짙은 초록 하나, 부드러운 연둣빛 하나를 바구니에 담는다.


고개를 돌리자, 저 멀리 그가 있다.

예상하지 못한 갑작스러운 만남.


보고 싶을 때마다 너와의 뜨거웠던 여름을 떠올렸다.

너와 함께할 수만 있다면 사계절이 온통 여름이어도 좋다.




수박.

수박을 좋아한다.

아니, 사랑한다.


여름을 기다리는 이유는 늘 수박이었다.

여름이 있어 행복한 이유는 수박이 있어서였다.




열 살의 어느 날.

흥건하게 젖은 티셔츠를 입고 집에 돌아왔다. 티셔츠 자락을 손으로 펄럭이며 냉장고 문을 열었다. 검은 주근깨가 여기저기 난 빨간 얼굴이 누워 있다. 언제나 투명랩으로 마스크팩을 하고 잔다. 하루에도 몇 번이고 녀석의 방문을 여닫곤 했다. 무거운 녀석을 두 손 위에 올리고 밥숟가락을 입에 물었다. 혹여나 떨어뜨릴까 조심스레, 그러나 재빠르게 티브이 앞으로 달려갔다. 달콤함과 시원함이 온몸을 타고 흘렀다.


3일이면 반통이 사라졌다. 상할까 봐 걱정하는 건, 그저 사치였다.




"수박이다! 수박 사야겠다."

수박을 보자마자 외쳤다. 쌓여있는 둥근 녀석들을 한참 동안 두리번거렸다. 설레던 마음이 점점 흐릿해지고 선명한 눈물이 맺혀왔다. 수박을 숟가락으로 퍼먹던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뒤이어 수박을 마음껏 먹을 수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간경화 합병증으로 배에 물이 찬다. 신장질환이 있어 수분 배출마저 쉽지 않다.


나에게 수분이란, 필요하지만 필요 없는 존재다.


온몸이 수분으로 만들어진 수박을 먹는다는 건, 이제 사치가 되었다. 물론 하루에 몇 조각은 먹을 수 있겠지만. 예전처럼 숟가락으로 먹고 싶은 만큼 먹을 순 없다. 화장실을 쉴 새 없이 들락날락거릴 일도 이제 없을 거다.


과일이라면 무엇이든 좋아한다. 수박을 먹을 수 없다면 다른 과일을 먹으면 된다. 수박도 몇 조각쯤은 먹을 수 있으니 그래도 다행이다.

그런데도.

마음 한켠이 묵직하다.


수박을 먹으려고 늘 세 번의 계절을 기다렸고.

수박을 먹으면서 참 많은 여름을 견뎠다.


그렇게 우린 오랫동안 함께였다.


나, 수박 많이 좋아했구나. 아주 많이.


너를 오래오래 볼 수 있도록.

너의 곁에 다시 돌아갈 수 있도록.

신장이랑 간한테 간절히 부탁해 볼게.



"수박아, 다음 여름에는 그때의 우리로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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