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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경심전 Feb 04. 2023

커피의 명품들

칼리타 황동포트

칼리타 황동포트는 커피를 내릴 때 사용하는 주전자다. 내가 이 포트를 처음으로 알게 된 때는 믹스 커피를 즐기던 시절이었다. 실물은 본 적이 없다. '윤광준의 생활 명품'이라는 책을 통해서다. 윤광준은 이 책에서 이렇게 감상을 적었다.


‘마치 알라딘의 마술 램프가 연상되는 고풍스러운 디자인. 학 모가지 형태의 주둥이와 그 흐름의 선을 연장한 것 같은 손잡이. 영락없는 이슬람 풍 주전자의 모습이다. 혼잡한 바그다드 바자르 귀퉁이에서 보았음직한 주전자가 주는 인상은 아라비안 나이트의 무대와 시간으로 돌아가게 한다.’


커피 용품은 커피잔 외에는 알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칼리타 황동포트의 사진을 처음 본 순간 지니가 램프에서 빠져나와 치명적인 주문을 외웠다. “저를 가져 주세요.” 명품이 주는 블랙홀 같은 중력이 내 시선과 관심을 끌어들였다. 그냥 소유하고 싶었다. 커피를 내릴 때 쓰기보다는 두고 보고 싶은 물건이었다. 이 시절 나는 커피를 좋아하지도 않았다.
  작전을 개시했다. 상대는 아내다. 알뜰한 살림꾼인 아내와 살면서 사고 싶은 물건을 불협화음 없이 구입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오디오를 취미로 하면서 오디오 장비를 구입할 때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배운 방법이다. 이후에 내가 쓰는 방법들이 로버트 치알디니의 '설득의 심리학'이라는 책에 나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첫 번째는 권위의 법칙을 사용한다. ‘윤광준의 생활 명품’에 나온 칼리타 황동포트를 보여주면서 어떻냐고 슬쩍 물어보았다. 심드렁한 반응이 나왔다. 예상한 반응이다. 무언가 괜찮다는 이미지만 아내의 머릿속에 남겨 놓으면 된다. 처음에는 이 정도로 끝낸다. 다음으로는 기회가 될 때마다 언급을 한다. 머릿속에 남편이 이 제품을 원한다는 이미지를 계속 심어 나간다. 아내의 합리성이 남편의 욕망을 여지없이 억누를지라도 포기하지 않는다. 마지막 승부처는 신중히 고른다. 생일 선물이었다. 그동안 원두커피에 대한 관심도 지속적으로 주입시켜 주었다. 계속 버티던 아내는, 처형도 사고 싶은 제품이라는 말을 듣고 백기를 들었다. 아내는 한 술 더 떴다. 원두커피 드립에 필요한 커피 그라인더, 드리퍼, 서버, 원두커피, 필터를 세트로 사주었다. 브라보! 이번에도 이 방법은 잘 통했다.


실물은 사진보다 강렬했다. 황동 재질은 시각적으로 어떤 다른 금속보다도 정숙함과 안정감을 준다는 사실을 이때 알았다. 순수한 구리는 붉은색을 띠나 아연이 첨가된 구리는 황색으로 바뀐다. 금처럼 천박하게 반짝거리지도 않고, 은처럼 풀이 죽어 있지도 않았다. 갈색에 가까워 묵직한 중량감이 느껴지는 물건에 적당하게 광을 내어 근엄함과 초싹거림 사이에 균형을 맞추어 놓았다. 손잡이를 잡고 감상하기보다는 손바닥 위에 주전자를 올려놓고 세부를 들여다보았다. 일본도로 단번에 베어낸 듯한 주둥이의 예리함, 본체의 열이 손잡이로 최소한으로 전달되도록 고려한 설계, 원활한 물의 흐름을 위해 날렵하게 뽑아낸 긴 주둥이, 어느 하나도 흠잡을 곳이 없었다. 또한 각 부분이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비례의 조화로 마무리된 물건은 구매자에게 더 없는 만족감을 안겨주었다. 기능과 필요를 완벽하게 실현한 장인의 물건은 필연적으로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 
 
 칼리타 황동포트를 막상 사용해 보니 옥에 티가 하나 있었다. 손잡이였다. 너무 가늘고 매끈해서 잡기가 불편했다. 끈 같은 것으로 묶으면 두께를 보강하고 미끄러움을 줄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이소에서 눈에 띈 것이 아래 사진의 종이 로프다. 100미터에 1000원. 시도해 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쪽 시작점에 끈을 고정하고 끈을 꼼꼼하게 손잡이에 감아 나갔다. 끈의 두께가 그다지 두껍지 않아 밑에서 다시 한번 시작점까지 감아올려주었다. 일단 모양새가 괜찮고 색도 본체와 잘 어울린다. 사용감도 아주 만족스럽다. 한 가지 우려되는 바는 종이 재질이라서 물에 취약하다는 사실이다. 손잡이와 비슷한 형태의 소나무 가지를 실톱으로 켜서 부착해 보고 싶었으나 실력의 한계로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물건은 사용되는 과정에서 사용자와 함께 상호작용하면서 발전하는 과정을 거치기도 한다. 자동차 마니아들은 차를 자기 감성에 맞추어 디자인과 출력과 배기가스 배출 소리를 조정한다. 오디오 마니아들은 자기가 원하는 소리를 얻을 때까지 앰프의 부품을 바꾸기도 하고 진동을 줄일 수 있는 각종 장치를 설치한다. 이러한 튜닝 과정을 거치면 기업에서 제공하지 못했던 틈새의 영역에서 유용성을 더할 수 있다. 이에 더해서 사용자는 제품의 디자인 과정에 참여한 듯한 심리적인 만족감과 더불어 남이 소유하지 못한 제품을 가지고 있다는 우월감을 동시에 얻을 수 있다. 칼리타 황동포트의 손잡이를 개선하고 나서 사용해 보니 손 안의 공간에 손잡이가 쏙 들어와 밀착되는 느낌을 받았다. 드립퍼에 나선형으로 물을 따를 때 포트를 흔들거림이 없이 안정적으로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남자는 모름지기 취미 생활을 시작하면 장비 욕심을 낸다. 오디오, 낚시, 자전거 등을 취미로 하는 사람들을 관찰해 보면 공통적으로 비싸고 성능이 좋은 장비를 사들인다. 취미를 가져 본 남자들은 모두 동의하리라 생각한다. 아내가 사준 핸드 드립 커피 기구들을 쓰면서 작센하우스 핸드밀과 같은 장비를 사 볼까 고민도 해 보았다. 그러나 핸드 드립으로 커피를 내리기가 귀찮아지고 아내가 전기를 사용하는 커피 머신을 산 후에 장비 욕심을 버렸다. 좋은 장비로 커피를 내리기보다는 편한 장비로 커피를 내려 마시는 날이 많아졌다. 칼리타 황동포트도 원래 의도대로 장식장에 두고 감상하는 용도로 정착되었다.


덴비 그린 크래프츠맨 머그컵

커피의 맛 중에서 쓴맛 외에도 단맛, 신맛, 바디감이 아렴풋이나마 구별이 되기 시작했을 시점이었다. 꼬장꼬장한 내 감성이 어떠한 저항이나 합리화 과정 없이 한눈에 받아들일 수 있는 품격 있는 컵을 가지고 싶었다. 칼리타 황동포트와 짝을 이루어 전원의 아침에 눈 맛과 입맛을 동시에 만족시켜 주는 컵 말이다. 인터넷 세상에 존재하는 머그컵들을 다양하게 클릭했지만 짧은 시간만 보고 넘어갔다. 내 감성으로부터 단 한 번에 오케이 사인을 받아야 했다. 살펴보고 검토해서 결정되어서는 안 됐다. 그러던 어느 날 덴비 그린 크래프츠맨 머그컵이 눈에 들어왔다. 장인의 머그컵이라는 뜻으로 숙련된 장인들의 손에서 태어난 고급 머그컵이라는 소개 글이 달여 있었다. 영국의 대표적인 꽃인 장미 형상에 한국의 청자 색을 입힌 디자인이었다. 동서양이 만난 듯한 오묘한 매력이 느껴졌다. 미술사학자 고유섭은 고려청자를 ‘화려한 듯하지만, 그러나 화려한 그 속에는 여전히 따뜻하고 고요한 맛이 있다. 청자는 고려인의 파란 꽃이다’라고 표현했다. 덴비 머그컵은 고유섭의 표현대로라면 영국의 푸른 장미꽃이다. 
 실제로 사용해 보니 절제된 형태로 깔끔하게 마무리된 디자인이 마음에 들었다. 단단하고 실용적인 쓰임새로 만들어진 물건이었다. ‘스톤웨어 특유의 질감이 느껴지는 푸른빛, 청아하고 단아한 빛깔’이라는 평이 있었지만 내 눈에는 청자의 비색에 비하면 한 참 못 미치는 투박한 색으로 보였다. ‘일상에 스민 청자의 품격’이라는 표현도 과해 보였다. 실루엣이 예쁘고 그립감도 좋았다. 마실 때 입술에 닿는 면과 접촉하면 키스의 달콤함을 깨닫았을 때의 느낌이 들도록 입술의 형태와 조화롭게 어우러져 부드럽게 다가온다. 단점이 하나는 있었다. 무게 일반 커피잔보다 좀 무거웠다. 아내는 이 잔을 사용하지 않는다.


더 눈 아라베스크 커피잔

2018년 두바이로 출장을 가게 되었다. 한 달이나 되는 기간이라서 주말에 쇼핑할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 첫 주말에 아내가 준 숙제를 해 치웠다. 얼굴을 희게 해 준다는 크림 몇 개 등 아내가 지정해 준 물품을 샀다. 다음 주에는 나를 위한 쇼핑을 하기로 했다. 타깃도 명확했다. 독특하면서도 나만의 감성에 맞는 커피잔을 사고 싶었다. 용인 집에는 덴비 머그컵 외에 세 종류의 커피잔을 가지고 그때그때의 기분에 맞추어 커피잔을 선택하 곤 했다. 무언가 신선함을 추가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느껴졌다. 생활용품을 파는 가게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내심 염두에 둔 디자인은 중동의 아라베스크 문양을 응용한 디자인의 커피잔이었다. 이 문양은 아랍에서 만든 장식 무늬로 이슬람교 사원인 모스크의 벽면이나 공예품, 서책 등에서 볼 수 있다. 식물의 줄기와 잎을 도안화하여 만든 독특한 무늬다. 
 아라비안 나이트 요술 램프의 지니가 요술을 부렸을까 어렴풋이 그렸던 이미지가 현실 속 실물로 내 앞에 나타났다. 두 눈 Dunoon이라는 메이커에서 Zahra라는 브랜드로 내놓은 제품이었다. 다양한 아라베스크 무늬를 응용하여 잔에 새겨 넣었다. 디자인이 다양했다. 주로 붉은색, 자주색, 푸른색 계열로 모스크에서 자주 보았던 색상들이었다. 기하학적인 무늬가 대칭적이고 반복적으로 배합되어 독특하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붉은색 머그컵 두 개를 샀다. 하나는 아내 용이었다. 한국에 들어와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국내에는 들어와 있지 않은 디자인이었다. 중동에 특화된 모델이라고 생각됐다. 나만 가지고 있는 물건은 그 자체로 소유에 대한 만족감과 남들과 다른 경험을 하고 있다는 즐거움을 준다.


 무료한 일상을 소소한 재미로 채워서 좀 더 풍요롭게 살기를 원한다면 내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욕망에 부합하는 물건이 무엇인지 탐색해 보고 소유해 보자. 욕망을 부정적으로만 생각하지 말자. 원하는 소소한 물건을 소유함으로써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욕망으로부터 자유를 얻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고 싫어하는 것은 무엇인지 알면 좋겠지만 나 자신의 취향을 정확히 모르는 경우도 많다. 나는 이럴 때는 뇌에 무차별적으로 많은 정보를 주입해 준다. 그러면 시간이 지나면 뇌가 알아서 정리를 해 준다, 그러고 나서 선택할 때는 예리한 감각과 직관을 활용하여 제대로 된 물건을 까다롭게 골라보자. 마음을 확 잡아 끄는 물건이 있다면 참지 말고 소유해 보라고 하고 싶다. 애착이 가는 물건을 다 써 보기에 인생은 너무 짧다. 내 마음의 명품은 생활을 더 풍요롭게 해 준다. 살 준비를 하고, 구매를 해서 박스를 개봉하고, 실제 사용해 보기까지 모든 과정은 설렘의 연속이다. 일상에 활력이 불어넣어 진다. 사고 나서는 꾸준히 사용하면서 축적된 욕구를 마음껏 발산하라. 설렘은 오래가지 않는다. 무덤덤해지는 순간이 오면 특별한 장소에 소중히 보관해 두시라. 첫사랑의 감정이 다시 찾아올지도 모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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