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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텔 Aug 19. 2023

히로시마 용의자에 바치는 애가

<오펜하이머> - 개인적인 과대망상 3분할 리뷰

영화 <오펜하이머>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1. 봄의 제전


맨해튼 프로젝트에서 오펜하이머의 역할은 실제 연구에 투입되는 과학자보다 전반적인 프로젝트의 진행을 관리감독하는 책임자에 더 가까웠다. IT 업계의 소프트웨어 개발 프로젝트에 비유하자면 개발자가 아닌 프로젝트 매니저의 역할일까. 영화도 그로브스 장군으로 대표되는 군대 조직의 경직성과 과학자 커뮤니티의 창의적인 자유로움 사이에서 훌륭한 가교 역할을 해내는 오펜하이머의 정치적 능력을 강조한다. 스크린에 그로브스와 나란히 담기는 많은 장면에서 오펜하이머는 과학자들이 일하는 방식을 이해시키려 애쓰되 절대 지나치게 주장하지 않는다. 도리어 두 사람의 케미스트리가 빛나는 장면들은 이 사람이 원래 물리학자였는지 행정가였는지 잠시 헷갈리게 만들 정도다.


기고만장하고 독선적인 성격의 소유자로서 오펜하이머가 내린 중요하고 과감한 선택들은 프로젝트의 성공에 결정적으로 기여한다. 일례가 영화에서는 비교적 빠르게 지나가는 포신결합 방식과 내파 방식 사이의 갈등이다. 내파 방식은 폭탄 내부의 작은 폭약을 폭발시켜 여러 조각으로 분산된 플루토늄을 한데 모아 압축하는 기술인데, 이때 사용되는 소규모 폭파의 충격파를 정확히 예측하기 까다롭다는 단점이 있었다. 구멍 뚫린 플루토늄 덩어리에 막대 플루토늄을 집어넣어 합치는 방식인 포신결합 방식은 기술적으로는 더 간단하지만, 정제 플루토늄의 순도가 예상보다 낮아 불발탄이 생길 가능성이 높다는 한계를 뒤늦게 발견하게 된다. 포신결합에 우라늄을 사용할 수는 있었지만, 느린 정제 속도 때문에 시간 내에 폭탄 한 기 분량밖에 생산할 수 없었다.


로스 앨러모스는 공식적으로 포신 결합을 사용할 예정이었지만 오펜하이머는 본인의 판단 하에 계속해서 물리학자 네더마이어가 이끄는 내파 연구팀을 운영하도록 지원한다. 덕분에 포신결합의 플루토늄 순도 문제를 발견한 1944년 4월 이후 프로젝트는 내파 방식으로 급선회할 수 있었고, 더불어 내파 방식의 마지막 기술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네더마이어를 사실상 경질하고 폭약 전문가인 키스차콥스키를 내파 팀의 리더로 임명하는 과감한 결단을 내린다. 결과적으로 플루토늄 내파 폭탄 2기와 우라늄 포신결합 폭탄 1기가 생산되었고, 트리니티 실험과 나가사키에 플루토늄 폭탄, 히로시마에 우라늄 폭탄이 떨어진다.(1)


‘대수학은 음악의 악보와 같은 것이다, 악보를 읽을 수 없더라도 음악을 듣는 능력이 있다면 충분하다’는 닐스 보어의 조언을 떠올린다. 오펜하이머가 가지고 있던 리더의 자질은 그가 양자역학의 한 단면을 깊게 읽어내는 것보다 그 세계의 독특한 풍경을 바라보는 일에 더 뛰어났던 것에 기인한 것일지도 모른다.(2) 트리니티의 폭발을 텐트의 작은 구멍으로 지켜봤음에도, 그는 텐트 밖 다른 과학자들보다 더 뜨겁고 혼란스러운 불의 춤, 더 넓은 시야 가득히 퍼지는 피의 책임을 보았을 것이다. 거대한 제단, 두 귀에는 여전히 <봄의 제전>이 흐르고,



2. 트리니티


솔직히 트리니티 폭발 신은 기대보다 소박하긴 했다. 1.43:1 화면비를 활용한 압도적인 스크린 사이즈, 말 그대로 피지컬로 찍어 누르는 용산CGV 아이맥스관이 아니었다면 더 실망했을지도 모르겠다. (사담을 덧붙이자면 이번이 용아맥 첫 관람이었고, 그동안 ‘야 용아맥은 차원이 달라’를 달고 사는 용아맥무새들을 참 싫어했지만, 야 진짜 놀란은 용아맥에서 봐야 하겠더라…) 킬로톤이 아닌 몇백 톤 급으로 재야 할 것 같은 현실적인 폭발은 원자폭탄의 무게감과 상징성을 담기에는 부족했고, 광복절 특수와 맞물린 카타르시스를 기대하고 온 한국 관객들에게는 특히나 실망스럽지 않았을까 싶다. 사실 CG 사용을 최대한 자제하는 놀란 감독의 성향상 어느 정도 예상 가능했던 단점이다. 이전작 <덩케르크>에서도 CG를 배제한 촬영 탓에 시각적으로 표현되는 전쟁의 규모가 왜소해졌고, 때문에 전쟁영화가 주는 매력이 반감되었다는 부정적 평가가 존재했으니. (물론 <덩케르크>는 ‘그런’ 전쟁영화가 아니다!)


반면 <테넷>, <인터스텔라> 등의 SF적 색채가 짙은 작품에서는 그의 촬영적 리얼리즘에 대한 천착이 큰 매력으로 작용한다. 상상을 기반으로 한 세계를 현실에서 구현하는 것이 일종의 핍진성을 부여하고 묘한 현실적 애착을 선사하는 방식이라면, 정사를 순수 현실에서 재구성하는 일은 필연적으로 ‘측정 가능한 비교대상’을 상대로 싸우는 불리함을 내포한다. 이쯤에서 생각해 본다. 영화계에서 가장 많은 예산을 동원할 수 있는 감독 중 하나인 놀란이 충분한 스케일로 재현할 수 없는 사건이라면, 도대체 인류는 어떻게 그 사건을 일으키고 감당해 낸 걸까. 인간이 진심으로 상대 인간을 멸망시키려 했던 그때의 적의는 얼마나 비현실적인 장면을 현실에 소환해 냈나. 가끔씩 항공모함이나 비행기를 보며 ‘도대체 이걸 인간이 어떻게 만들었을까’하는 기시감이 드는 것처럼, 우리가 당연히 받아들이는 역사적 사실은 우리의 상상적 한계 한참 바깥에 있는 극단적 이벤트인 경우가 많다. 어쩌면 인간의 상상력은 이러한 극단의 경험을 통해 확장해 온 것일지도 모른다. 이제 세계 대전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측정 가능한 비교대상이 생겨 버린 불쌍한 종족.


서사적 구성을 강조하기 위해 폭발의 카타르시스가 의도적으로 절제되지는 않았을지 감히 추측해본다. 놀란 감독 특유의 서사 기법으로 세 개의 시간축을 동시에 전개하는 <오펜하이머>지만, 서사의 큰 줄기는 트리니티 실험 전과 후로 나뉜다. 폭발 이후 한 시간 동안 영화는 오펜하이머를 공격하는 이데올로기, 개인적 원한, 동료들의 배신과 침묵, 그리고 거대한 죄의식을 치열하게 훑는다. 로스 앨러모스를 잠식한 정신적 낙진을 묵묵히 견디는 오펜하이머의 인간적 고뇌를 전면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이를 소화할 관객의 힘을 남겨놓으려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는 원자폭탄으로 인한 그 누구의 죽음도 그리지 않는다. 트리니티 실험의 폭발 자체는 그 누구도 죽이지 않았다. 오펜하이머와 로스 앨러모스의 죄의식은 히로시마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결국 폭발했는지 안 했는지, 죽였는지 안 죽였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원자폭탄이 어느 곳에도 쓰이지 않고 전쟁이 끝났다고 해서 그들의 죄의식이 완전히 사라질까? 인간은 새로운 지옥을 창조했고, 22만 명이 죽은 그 8월은 단지 지옥의 한 스틸컷이다. 영화가 현실의 아주 대략적인 모사이듯이.



3. 청문회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한 인원들 속에서 과학자와 공학자를 구분하는 일은 쉽지 않다. 이론 팀에 속해 오로지 자연 현상에 대한 규명에만 힘을 쏟은 물리학자일지라도, 프로젝트 자체가 대형 살상무기의 발명을 목표로 전개된 만큼 응용과학 내지 공학 연구로 분류되는 것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1930-40년대의 과학계 전체가 그러할 수밖에 없었다. 국가의 목표가 이데올로기와 혐오와 생존의 깃발 아래 재조정되는 시기에 과학은 더 이상 세계에 대한 순수한 지적 호기심이라는 고고한 가면을 쓸 수 없었다. 자연의 힘을 사용 가능한 형태로 추출해 내는 것, 그 힘으로 물리적 우위를 쟁취해 내는 것, 다시 말해 기술을 위해 과학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과학에는 의도가 없지만 기술에는 의도가 있다. 이전에도 순수과학과 응용과학/공학의 경계는 흐릿했지만, 맨해튼 프로젝트는 ‘지식의 추구에는 선악의 가치를 매길 수 없다’는 과학철학적 명제를 가장 선명하게 위협한 사건이다. 과연 과학적 지식이 순수하고 절대적인 개념으로만 남을 수 있는지, 세상을 더 많이 아는 것이 인간에게 과연 도움이 되는지, ‘지적 호기심’이라는 순수한 동기란 거대한 합리화에 불과한 것이 아닌지. 이 모든 문제는 지식 추구의 행위자가 인간이기 때문에 비롯된다. 우리는 더 이상 서로의 양심을 믿을 수 없다. 합리적 공동체를 자임하는 인간 사회에게 과학적 발전을 허락하겠느냐는 질문은 일찍이 제우스가 인간에게서 불을 빼앗으며 던졌던 바 있다. “프로메테우스, 불쌍한 프로메테우스”…


로스 앨러모스의 과학자들은 모두 차악을 선택한다. 나치의 손에 이토록 위험한 무기가 들어가게 하지 않기 위해서, 더 많은 피를 흘리게 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의 소년들을 집으로 살아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이들 개인에게 몇 없는 선택지를 제시한 것은 전쟁이고 이념이며 사회다. 근본적으로 선이 존재하지 않는 시스템에서 악에 종사한 누군가를 탓하는 일이 마냥 쉽지만은 않은 이유다. 킬리언 머피가 훌륭하게 묘사하는 인간 오펜하이머의 모순적 면모는 전쟁의 미명 아래 사회 구성원 모두가 감내할 수밖에 없었던 거대한 윤리적 모순을 투사한다.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 발명의 용의자로 지목된 개인들이 시대가 강제한 원죄에 피폭되는 과정을 그리며, 핵무기를 발명한 것은 그 어떤 개인도 아닌 이념과 권력의 시스템 자체였음을 폭로한다.


원자폭탄의 발명 이후로 과학기술이 인간을 해할 수 있다는 현실에 대응하기 위한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과학과 기술, 인간과 비인간, 기술과 사회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는 과학기술사회학(STS), 이러한 과학기술과 사회가 이루는 거대한 네트워크에 대한 개념인 테크노사이언스 등의 연구 분야 또한 전후 및 냉전 시대에 본격적으로 대두된다. ‘과학기술은 어떻게 인간과 사회를 바꾸는가? 가능한 위험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대응하고 변화해 가야 하는가?’ 과학기술의 발전은 필연적으로 가속화할 것이고, 사회적 논의는 아직 그 속도에 발맞추지 못한다. 그래도 나는 아직 낙관적이고 싶다. 시네마 기술의 최전선에서도 여전히 온전한 인간의 힘을 담아내려는 놀란 감독의 고집과 같이, 기술의 홍수 속에서 꿋꿋이 지켜낼 한 가닥의 인간다움을 믿는다. 여전히 과학도의 길을 걷는 용감한 나의 친구에게 얼마 전 남겼던 편지의 구절을 기억나는 대로 옮긴다.


“네가 여전히 믿고 있는 선한 과학의 힘을 증명해 내는 올바르고 멋진 과학자가 되기를, 그래서 결국 내가 틀렸음을 반증해 주기를. 그 끝에서 언젠가 다시 우리를 구원해 주기를.”




(1) 오펜하이머의 용병술에 관련한 일화는 서울대 홍성욱 교수 저 <홍성욱의 STS, 과학을 경청하다> 속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함.

(2) 물론 그의 뛰어난 구체적 연구 성과들을 고려하면 지나치게 박한 평가이다 - 대표적으로 원자핵과 전자 간의 질량 차에 따른 속도 차를 고려하면 전자의 파동함수를 계산할 때 원자핵의 움직임을 무시할 수 있다는 가정인 보른-오펜하이머 근사와, 특정 질량 이상의 항성이 붕괴할 때 내부로의 연속적인 중력 수축이 진행되며 블랙홀이 생긴다 제시한 1939년의 연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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