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무드 없는 어떤 남자가 있었어요.
세상에서 가장 무드 없는 어떤 남자가 있었어요.
얼마큼 무드 없냐면
연인이 사회 보는 축제행사에 꽃을 사 가긴 사 가야겠는데
생전 꽃을 사 본 적 없는 남자라
고민고민 하다가
결국 장미를 사긴 샀는데
그걸 또 어떻게 강당까지 들고 가야 할지 난감해
그 예쁜 꽃을 신문에 둘둘만 후
그 당시 유행하던 대학 가방에 푹 집어넣고는
여대 강당까지 가서
식이 다 끝나고 마지막 인사말을 하던 무대 위의 애인에게
다 망가진 장미를 불쑥 내밀던
어떤 남자가 있었대요.
그런데 받은 꽃이 싱싱하긴 한 것 같은데
모양이 좀 흐트러진 게 이상해
그 여자가 물었다지요.
‘꽃을 어떻게 가지고 왔길래 이렇게 다 구겨졌냐고?’
그랬더니 이러저래해서 그렇게 됐노라고 고백하더래요.
게다가 수많은 여학생이 가득한 축제행사엔
난생처음 가 보는 거라 무척 떨렸는데
마지막 인사말을 하는 그 순간 무대엘 올라가지 않으면
평생 후회 할 것 같아
눈앞이 캄캄했는데도 불구하고 올라갔다나 어쨌다나
그러더래요.
그렇게 세상에서 젤 무드 없는 남자가 있었습니다.
직업상 주로 자정이 넘어 퇴근하던 어느 집 남편이
마누라 생일이라 꽃은 사 주긴 사줘야겠는데
너무 늦게 퇴근을 하다 보니
집 주변에 문 연 꽃집이 없더랍니다.
그래서 겨우 찾아낸 곳이
집 근처 비닐하우스 화원이었는데
그곳에서 사정사정하고 ‘꽃’이라는 걸
하나 사 오긴 사 왔는데
그건 다름 아닌 ‘철쭉이 만개한 화분’이었답니다.
그래서 그 집 마누라는 생전 처음
생일 선물을 ‘철쭉 화분’으로 받았답니다.
그리고 그 화분은 아직도 그 집 베란다에 있다나 어쨌다나
근데
오늘
그 집 여자는
또 꽃을 받았습니다.
근데 이번에도 또 기가 막힌 꽃이었는데
그건 다름 아닌 ‘그림꽃’이었답니다.
사실
오늘이 그 집 부부 결혼기념일이라는데
아침엔 아무 말 없던 그 집 남자가
메일을 보냈다네요.
제목은 ‘연애편지’
그리고 그 편지엔 분홍빛 장미꽃이 들어 있었는데
그날 그 집 여자는 눈물을 펑펑 쏟았다나 어쨌다나,
실은
요즘 그 집 남자가 하는 일이 잘 안 돼서
선물 같은 건 기대도 안 했다는 데,
게다가 기억이나 해 줄지 의문이었다는 데
글쎄
그렇게 사람을 울리더랍니다.
그래서 집에 가려다 말고 멜을 보고 하도 눈물이 나와서
차마 문 밖을 나 갈 수 없어서
이렇게 창피한 줄도 모르고 과거사를 주절거리고 있다나 어쨌다나.
세상에서 젤 무드 없는 그 남자가 보낸 그림꽃과 메일 전문인데
그 남자가 행여 이걸 보고 지우라고 하면
그 즉시 삭제할 예정입니다.
하도 무서운 남자라^^
그리고 그가 하는 일이 빨리 잘 되기를
그래서 예전처럼 흰소리 뻥뻥 치는
남자였음 참 좋겠습니다.
오늘 어쩌다 과거 글창고를 뒤적이다 아주 오래전, 글을 만났습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그림 꽃 메일에 다시 또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울컥해서
퇴근하는 전철에서 울 뻔했습니다.
두 번째 꽃까지는 생생히 기억나는데 글까지 쓴 그림꽃을 까맣게 잊고 살다니
오늘 그이에게 그림 꽃 편지를 보여줘야겠습니다.
이미지로 첨부된 그림 꽃은 지금은 보이지 않고 편지글만 남아 있네요.
혹시 메일함에도 있나 검색해 보니 어머나 진짜 2004.4.3일에 받은 메일이 아직도 보관되어 있네요.
그땐 다 한메일만 쓰던 시대라...
아마 받은 메일함을 정리하다가 소중한 편지라 남겨 두었나 봅니다.
편지 제목은 '연애편지'였네요. ㅎㅎㅎ
유명 작가도 아니고, 출판한 책도 없지만
인터넷에 오래 글을 쓰며 살다 보니 우리의 역사가 메모 같은 글 속에
꼭꼭 숨어 있네요. 디지털의 순기능인 것 같습니다.
(참. 세상에서 젤 무드 없는 남자가 지금 보니 글도 잘 썼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