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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들불호수 Feb 08. 2023

비건과 동성애 / ‘원래 그런 거야’

Episode #5

아빠 INFP가 구워준 삼겹살은 일품이다.

사실 아내는 다른 글보다 아빠 INFP가 각종 고기 굽는 법을 정리해서 책을 내면 잘 될 것이라 확신할 정도다.

집에서 맛있게 굽는 법,

식당에서 맛있게 굽는 법,

장작 위에서 타지 않게 굽는 법 등

나름 코미디언 김준현만큼이나 각종 고기 굽기에 자신이 있다.

그래서 아들도 딸도 아빠 INFP가 구워주는 삼겹살을 좋아했다.


삼겹살 상추쌈을 좋아하던 딸 INFP가 요즘 삼겹살을 잘 먹지 않는다.

며칠 전 읽어보라며 슬쩍 책을 건네주었다.


"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 [지은이 멜라니 조이, 펴낸곳 모멘토]


유발 하라리가 출간 10주년 기념 개정판 서문을 작성했을 정도로 꽤 유명한 책이란다. 심리학자이자 비건 운동가인 저자 멜라니 조이는 심리적인 부분을 시작으로 채식주의와 육식주의의 역사적인 이야기와 현실적인 이야기들을 담담하면서도 대담하게 풀어나간다. 이 책에는 한 장의 사진도 실려 있지 않지만 육식주의가 만들어낸 끔찍한 현실에 충격으로 눈이 찌푸려지는 부분이 많다. 어려서부터 동물을 사랑하고 감정을 중요시했던 딸 INFP는 이 책을 읽고 비건을 선택한 것 같다.


"딸아, 원래 성장기에는 여러 영양분이 필요한 거야. 그러니까 성장할 동안만은 육류를 조금이라도 먹어야 하지 않을까?"

채식주의와 육식주의에 대해 정말 '1'도 모르는 아빠 INFP가 나름 고민하고 처음에 던졌던 질문이다. 책을 읽고 조금 더 공부하고 나서야 이 질문이 어리석었음을 알게 되었다. 멜리나 조이는 "원래 그런 거야"라는 표현을 앞세운 육식주의를 철저히 파헤치고 그 당위성을 처절하게 깎아내어 버린다.


"원래 그런 거야"라는 말은 힘을 잃어가고 있다. 이 말에는 "라떼는 말이야"의 냄새가 난다.

솔직히 말하면 처음에는 딸 INFP를 비건에서 돌이킬 방법을 고민했다. 하지만 책을 읽다가 아빠 INFP가 깨달은 것은 딸과 아빠가 서로 공감하며 대화하는 시간의 중요성이었다. 같은 INFP지만 우리는 살아온 시간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서로 다른 시간과 세대 속에서 아빠의 각종 이데올로기가 딸에게 그대로 전달될 수는 없다.


만약 우리가 부딪힌 첫 번째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비건이 아니라 동성애였다면 어떠했을까?

이 질문은 어쩌면 단순해 보였던 비건 이야기에 함부로 접근할 수 없도록 아빠 INFP에게 경종을 울렸다.

비건이나 동성애가 잘못이라는 말이 아니다. 아빠 INFP에게는 '원래 그런 것'들이었던 신념들이 이제 그 힘을 내려놓고 있다. '원래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 고등학생이 되는 딸 INFP도 아빠 INFP 못지않게 삶을 고민하고, 세상을 고민하고, 관계를 고민하며 자기의 답을 찾아나가고 있다. 딸이 찾고 선택한 답은 아빠가 선택한 답과 다를 수 있다. 틀리고 맞고의 문제가 아니라 다름의 영역이다. 이 다름을 아빠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딸이 고민하는 만큼 아빠도 고민해야 함을 이해하게 되었다.


우선 비건부터 공부하기로 했다. 비건은 나의 관심사가 아니고, 나의 신념과 거리가 멀었기에 애써 들추어보지 않았던 세상이다. '원래 그런 것'을 강요하기보다 함께 공부하며 우리의 답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같은 INFP이기에 같은 이데올로기를 가질 것이라는 믿음은 그야말로 환상이다.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의 대립과 갈등은 먼 곳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가족 앞에 놓인 현실이다. 아빠 INFP가 따르고 있는 종교, 정치, 문화, 성향의 이데올로기들이 우리 아이들에게 모두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으리라. 아빠의 이데올로기를 강요할 생각은 없지만...


여기서 나의 글이 막혔다.

정말 나는 강요할 생각이 없는가?


비건, 그래 비건 오케이! 이건 같이 생각해 봄직한 문제다.

정치, 와... 여기서 조금 막히는구나.

종교, 주여... 어찌하오리까?

성향, 그중에 동성애...


여기서 나의 생각이 막혔다.

난 이 부분에서는 '1'이 아니라 '0.00001'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동성애에 대해 나름 토론도 많이 했고, 자료와 영상도 많이 찾아보고 생각도 많이 했다고 여겼다.

하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은 타인의 이야기였을 뿐이었다.

나의 이야기, 나의 가족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우리 딸, 우리 아들이 아니더라도 아이들은 주변에서 곧 이 부분으로 고민하는 이들을 만날 것이고, 그들과 대화하게 될 것이고 이데올로기의 충돌 앞에 서게 될 것이다. 그때 아이들은 어떠한 결론을 찾아가게 될까?


비건에 대한 이야기가 끝나면 아이들과 동성애에 대한 토론을 시작해야겠다. 비록 정해진 답이 없고, 함부로 건드리기에도 두려운 생각도 있지만 터부시 할 수 없는 부분이다. 딸 INFP와 아빠 INFP가 같이 이야기할 부분이 많아지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란 생각으로 시작해 보자. 두렵지만 가볍게!


photo by 들불호수


글작가 들불호수


#아빠와딸

#비건

#동성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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