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공부는 대학교 입학시험공부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 난 그 성적순위라는 올가미에 들어가 그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살아가는 삶에 경멸을 느낀다.〈1986년 1월 15일 새벽. S사대 부중 3학년 O양 유서 일부〉
전교에서 1등을 한 학생이었습니다. 당시 신문에 공개된 그 여학생의 유서가 성장과 입시과열로 치달아 가던 우리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습니다.
40년 가까이 흐른 지금. 어느 누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요? 지금은 달라졌다고.
학교가 주는 올가미가 입시교육이라는 점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학교는 좋은 노동자를 길러내기 위한 목적이었던 것이 현재 대한민국에서 학교공부는 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시험 즉, 대학교 입학 시험공부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물론, 대학 입시가 아닌 다른 다양한 목적을 위한 고등학교들이 존재하지만, 그러한 고등학교들마저 관련 학과인 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입시위주의 공부도 함께 이루어지고 있고, 대학의 관련 학과를 졸업하는 것이 취업활동에 보다 유리한 것이 현실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헤아려보아야 할 부분은 행복이라는 것은 어떤 것인가와 성적순이라는 것의 의미는 어떤 것인가를 잘 이해를 할 필요가 있다는 점과 대학에 들어간다는 것의 의미를 바로 볼 필요가 있다는 점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인간이 사는 목적은 바로 이 행복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 이후로 서양은 궁극적으로 행복을 추구하는, 즉 '인생의 목표를 행복에 두는' 가치관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에 반해 동양은 기본사상인 음양 사상에 따르면, 행복과 불행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 즉, 태극에 함께 들어있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유교에서나 불교에서나 지나친 행복 추구는 '욕망'으로 해석해 부정적으로 인식하였고, 자기 수행을 통해 외부 환경에 좌우되지 않고 늘 평안하고 행복한 느낌을 누리는 자기 조절능력의 구축에 초점을 맞추어 왔다는 점입니다.
최근 우리나라의 행복에 대한 추구나 담론도 서양 철학의 영향을 받은 결과라고 보입니다.
행복의 기준은 상당히 주관적이며, 사람들마다 다릅니다. 이러한 것은 각 개인이 자신의 기준이 있어야 하는 것이고, 그에 따른 판단이 필요한 영역입니다. 그와 반대로 명확한 것은 불행의 기준은 세계 공통의 나름의 기준을 제시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건강, 돈, 기본적인 의식주 해결, 사회적인 지지와 유대 등을 들 수 있습니다.
행복하다는 느낌의 토대는 나를 중심으로 가까운 사람들과의 원활한 소통을 들 수 있습니다. 가족들과의 대화와 소통, 늘 얼굴을 맞대고 함께 지내는 학교 친구들과의 이야기가 잘 통하는 것, 사회 구성원들과의 어울림이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땅과 같은 것인데요. 학교 입시공부는 본질적으로 시험문제를 나에게 얼마나 효율적으로 입력하고 그것을 다시 스스로 출력해 내느냐의 견주기입니다. 나를 둘러싼 누군가와 주고받는 과정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거기에 더해 서로 간의 경쟁이라는 부분까지 두드러지게 되는 구조를 시험이 가지고 있습니다. 행복이라는 토대가 지진처럼 흔들려버리는 것이죠.
학교 입시공부는 시험을 통해 그 성과를 측정합니다. 그것을 성적이라고 합니다. 성적은 순위를 매기게 되고, 그 순위에 따라 입학할 수 있는 대학이 달라집니다. 그 입학 시험 성적에 따라 소위 말하는 SKY(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영문 앞글자를 딴), 하늘에 존재한다는 일류대학이라고 사회가 인정하는 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지가 결정됩니다.
행복은 사람마다 그 기준이 다르고, 주관적인데, 학교공부는 획일적으로 대학 입시만을 위해서 시스템이 존재하고 운영되기 때문에 그 입시를 위한 시험을 본 성적순으로 행복을 논하는 건 애초에 존재할 수 없는 부분이 됩니다. 다만, 대학의 입학 순위에 따라 불행의 절대 기준이 달라진다면, 이 부분은 이야기를 다시 해볼 필요는 있을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의 불행위에
자신의 행복을 쌓지 말라.〈석가모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