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연애
남자아이들과 여자 아이들의 수업 분위기는 다소 다르다.
각각의 개성이 있지만, 여자 아이들의 경우 주로 친해지기 위해 내가 먼저 다가가면 수줍게 자신을 내보이는 스타일의 친구들이 많았고 남자아이들의 경우 첫 수업을 제외하면 나름대로 장난도 치면서 보다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친구들이 다수였다.
오늘의 주인공도 그랬다.
커다란 덩치와는 상반되는 여린 감성을 가지고 있었고 다른 친구들에 비하여 예의도 바르고 나름 질문도 많이 하는 학생이었다.
2. 나는 선생이고, 넌 제자야! : T의 비밀연애
여느 날과 같이 수업 중간, 학생의 집중도가 떨어졌다 싶어 졌을 때 쉬는 시간을 가졌다.
학생에 따라 다르지만, 주로 둘이 하는 수업이다 보니 쉬는 시간에도 핸드폰을 보거나 밖에 나가는 걸 조심스러워하는 학생들이 있어서 나는 일부러 "너 편하게 하고 싶은 대로 쉬어도 된다"라고 말을 하는 편이다.
그날도 편하게 쉬라는 말을 남기고 음료를 들이켜는데 T가 물었다.
"쌤은 제 나이 또래의 남자애가 이성으로 느껴지세요?"
그의 물음에 단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아니 전혀"
"아...."하고 여운 있게 고개를 끄덕이는 그에게 나는 "야 쌤 얼마 전에 결혼했어, 유부녀야, 네가 말하는 대상이 혹시나 나라면 절대 안 된다는 소리야"라고 장난을 쳤다.
하지만 굳어진 그의 표정은 좀처럼 풀리지를 않았고, 나는 뭐지 싶은 마음이 들어 질문의 이유를 물었다.
"사실은 제가 학교 쌤을 좋아해요"
뭐, 학교 다닐 때 교단에 선 선생님에게 일말의 호감이라도 느끼지 않은 학생이 과연 몇이나 될까.
다른 친구들도 새로 온 교생선생님이나 학교에서 인기 많은 선생님 이야기를 종종 들려주는 터라 단박에 "그럴 수 있다"라고 말해주었다.
그런데, 대수롭지 않은 나의 대답이 그에게 희망의 종소리라도 울렸는지 그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그럼 그 쌤도 저를 좋아할 수 있는 걸까요?"
"다른 사람 마음은 알 수 없지, 근데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선생님이 제자를 좋아하는 건 조금 다른 차원이지, 직업적 소명의식으로 학생을 보살피고 좋아하는 거지 이성으로 느끼고 그러면 안 되지 곤란하지"
이쯤 되니까 궁금해졌다. 도대체 그가 좋아하는 학교 선생님이 누구고, 왜 굳이 이 중요한 시기에 이런 일로 시름을 느끼는지.
그리고 뒤이어 듣게 된 그의 사연은, 정말 하나도 대수롭지가 않았다.
"선생님이랑 만나요. 이게 사귄다고 보기는 애매하고.... 근데 매일 전화하고 만나고, 주말에는 하루종일 같이 있기도 해요. 그분 집에 제가 가서 같이 있고요"
아니, 고등학생이, 그것도 고3 학생이 선생님과 그런 관계라니.
뉴스에서만 보던 이야기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처음 그 선생님이랑 친해진 건, 책 때문이었어요. 제가 글쓰기를 좋아한다니까 그분이 자신과 취미가 같다면서 책을 서로 추천해 주자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처음 개인 연락을 주고받게 되었어요. 그러다 주말에 같이 서점에 가고, 밥도 먹고 친해졌죠.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까 서로 잘 통하고 너무 재미있어서 자주 연락하고 만나게 되었어요. 그러다 지금의 상황까지 왔고요"
나는 놀란 가슴을 추스르고 물었다.
"그렇게 매일 전화하고 만나서, 그것도 주말에는 하루 종일 둘이서 뭐 하는데? 차라리 다른 친구들하고 같이 만나는 거면 이상하지 않은데, 지금 네 말은 쌤이 듣기에 아주 불순하고 이상해 보여"
"데이트하듯이 있어요. 맛있는 것도 먹고 영화도 보고 차도 마시고요. 다른 친구들은 몰라요. 선생님이 절대로 우리의 관계를 다른 사람한테 말하면 안 된다고 했어요. 그래서 쌤한테 지금 말하는 거예요. 제 딴에 궁금한 것도 있고 말하고 싶은 것도 있는데, 말할 사람이 없기도 하고 답답해서요"
너무 충격적이었다.
T는 이 선생님에게 푹 빠져있었다. 예체능 중에서도 글쓰기를 하는 아이인지라 다른 고3 학생들처럼 치열한 입시를 치르지 않았던 탓에 자신의 모든 스케줄은 다 이 여선생에게 맞춰져 있다고 했다.
즉, 그녀가 일하는 시간에는 자신도 공부를 하다가 그녀의 일과가 끝나면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하는 식이었다.
무엇보다 T는 지금 현재의 상황이 모호하고 혼란스러운 이유가 자신이 고등학생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몇 개월 후, 자신도 성인이 되면 그땐 당당하게 그녀의 남자친구가 될 수 있다고 여기는 듯했다.
여기까지 말을 듣고 보니, 괜한 걸 물어서 너무 많이 알게 되었다는 후회와 함께 나와 동갑이라는 그 여선생에게 참을 수 없는 화가 밀려왔다.
결국 이 수업이 끝나고 나는 급성 위경련까지 오게 되었는데, 나의 물음에 대한 그의 대답 때문이었다.
앞선 P의 경험으로 성인과 학생의 만남에 부정적인 시선을 가지게 된 나는 혈기왕성한 그가 걱정되는 마음에 "혹시, 선생님이랑 사귀는 사이는 아니라지만, 네가 현재의 관계를 모호하다고 생각하는 게 혹시 둘이 뭔가 있어서 그랬니?"
한참 고민하던 그는,
"네, 얼마 전에 선생님 집에서 저녁을 먹는데 선생님이 제게는 음료수를 주고 맥주를 드시더라고요. 그러더니 '너도 먹을래?'하고 권하길래 같이 마셨는데, 선생님이 피곤하다면서 침대에 누웠어요. 저도 따라 누웠죠. 그러고는 입을 맞추시더라고요. 놀라기도 하고 좋기도 했는데, 바로 실수라고, 미안하다고 했어요. 그때부터 혼란스럽기도 하고 기분이 이상했어요"
거의 막장 드라마가 다름없었다.
그건 마치 뉴스에서 종종 보던 '30대 여교사, 학생과 부적절한 관계 끝에 체포'라는 대서사시의 1막을 듣고 있는 것 같았다.
몇 개월 후 자신도 어른이 되면 그녀와 동등한 위치에서 멋지게 고백하고 남자친구가 될 수 있을 거라 꿈꾸는 듯한 그에게 나는 "글쎄다, 너도 이제 알 거 다 아는 나이라고 생각해서 내가 말하면, 쌤 생각에 그 여선생은 아마도 매년 너 같은 학생이 있었을 것 같아. 즉, 자리는 그대로인데 사람만 바뀌는 시스템인거지. 그 여자가 너한테 '우리는 사귀는 사이가 아니니 부담 가질 필요 없다, 그저 서로를 스쳐 지나가는 버스 정류장이라 생각하자. 너도 여자친구 사귀고 나도 남자친구 사귀고 그래도 된다'라고 말했댔지? 그건 네가 부담스러울까 염려한 게 아니라 자기가 그런 관계에 책임을 지기 싫으니까 하는 말이야. 좀 심하게 말하면 소아성애자로 보이기도 해 나는. 네가 좋아하는 사람에 대해서 이런 말을 해서 유감인데, 나는 너를 생각하는 그녀의 마음에서 크게 진실성이나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다"라고 팩트 폭행을 가했다.
이후의 수업에서도 T는 종종 그녀와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지만 나는 일부러라도 관심 없는 척하고 듣지 않으려 노력했다.
"주말에 하루종일 그 여자 집에 있으면 부모님이 이상하게 생각하시지 않니? 설마 독서실 갔다고 생각하시는 거야?"
"엄마아빠는 일하느라 제가 그냥 잘 있다고 하면 크게 신경 안 써요. 주말에도 일하시니까 저녁에나 얼굴 보는 정도고요"
사실, 나 또한 수업을 시작한 이후 한 번도 T의 부모님을 직접 뵌 적이 없는 터라 함부로 말을 꺼내기가 어렵기도 했다.
더불어 학기말이 돼 갈수록 그녀와 그의 관계는 점점 뒤틀리는 듯했다.
"선생님이 좋기는 한데.... 너무 막무가내예요. 자기 기분대로 저한테 화내면서 이제 그만하자고 했다가 다시 사랑한다고 좋아한다고 그러고.... 저도 선생님이 좋기는 한데 누구한테 말도 못 하고 티도 못 내고, 무엇보다 하라는 대로만 해야 하는 제 위치가 너무 답답하고 화가 나요"
여차하면 부모님께 말씀을 드려야겠다고 생각했던 그의 이야기는 입시가 마무리되며 더 이상 들을 수가 없었고 그 둘의 관계가 어떻게 끝을 맺었는지, 혹은 현재 진행 중인지는 나도 알지 못한다.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정말 서로를 정거장으로 생각하고 스쳐 지나갔을까? 아니면 나이와 신분을 뛰어넘은 진짜 사랑이었을까?
설사 그들이 진정으로 마음을 나눈 사이라고 해도 그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어른이라면, 선생님이라면, 학생인 그를 존중했어야 한다. 기다려주었어야 한다.
T는 '나도 학생에게 이런 감정 느껴본 건 네가 처음이야'라는 그녀의 말이 깊게 와닿았다고 한다.
아마도 내가 이 말에 콧방귀를 뀌었던 건 그녀의 그 '처음'이 너무나 익숙했던 탓일 것이다.
첫 사람은 중요하다.
연애의 첫 사람은, 추후에 만나는 자신의 연애관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관계의 틀을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처음 조형된 그 틀이 마지막까지 영향력을 발휘할지는 미지수지만, 좋든 나쁘든 첫 사람은 무시할 수 없는 흔적을 남긴다.
그녀와의 결말이 어찌 되었든, 내가 걱정하는 건 앞으로 있을 T의 만남이다.
모든 것을 상대방에 맞추고 결박되어 그녀의 작은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 굴복해야 했던 그가, 과연 추후에 건강한 연애를 할 수 있을까?
'그건 사랑이 아니라 가스라이팅'이라고 수없이 말해도 정작 당사자는 모른다는 걸 몸소 느꼈던 경험이었다.
이제 스무 살 어엿한 청년이 돼있을 T가, 지난 관계에서의 교훈을 발판 삼아 동일한 후회를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