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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now Lion Jan 04. 2024

그저 소리와 이름뿐이다

내가 보는 것들은 사실 진실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면서 피할 수 없는 크고 작은 고통들을 수도 없이 마주한다. 특히 인생에서 겪는 대부분의 괴로움은 인간관계에서 오는 괴로움이다. 사랑하는 이들이 아프거나 세상을 먼저 떠나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 어디 가도 나와 맞지 않는 이들을 계속 마주쳐야 해서, 아무도 곁에 없는 고립감과 외로움으로 등등 이토록 사람으로 인한 괴로움은 인생에서 느끼는 고통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영원할 것만 같은 사랑이나 우정도 어떤 형태로든 끝이 나기 마련이고 어떤 관계든 쉬이 소원해지기 마련이며 당장 영원할 것만 같은 관계도 사소한 오해와 불신으로 갑자기 허무하게 끝나버리도 한다.


혹은 '그 사람은 내가 생각했던 사람이 아니야.' 라며 깊은 절망에 빠져도 내 집착과 미련으로 헤어지지도 못한 채 곁에 있는 서로를 끝도 없이 원망하고 미워하며 그 증오를 원동력 삼아 한평생 큰 고통에 빠져 살기도 한다. 그리고 그 원망과 증오는 주변을 어둡게 물들이고 결국 자신을 태우고 병들게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또한 많은 이들이 스스로가 했던 과거의 잘못된 선택을 후회하고 한탄하며 고통스러워하기도 한다. 내가 그 선택을 하지만 않았더라면... 그때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그 사람을 만나지만 않았더라면... 끊임없이 과거의 일들을 재소환해 습관처럼 반복 재생하며 곱씹고 곱씹으며 생각과 기억을 점점 더 견고하게 만들며 살아간다.


나 역시 과거의 잘못된 선택들로 인한 회환과 후회가 가득하고 나 자신을 혐오하는 마음이 있다.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인정하기 싫지만 그 후회의 끝에 겨우, 그저 일어나야 했을 일이 일어났던 것뿐이라고 그 시간의 나는 그 당시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했을 뿐이라고 그러니 지나간 일을 굳이 재소환해 자꾸 생명을 불어넣고 이름표를 붙일 필요가 없다고. 자꾸 마음속으로 되네이지만 말끔하게 그 마음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리고는 그 과거에 나를 묶고 관념을 만들어 '나는 이러했던 사람이니 지금도 여전히 이러한 사람이다.'라고 스스로 정의를 내리고 그것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완벽한 사실로 믿어버린다. 그러니 나는 꼼짝없이 내가 정의한 대로 그런 사람이 될 수밖에 없고 그리 되어야만 한다. 지금의 나는 사라지고 과거의 나에게 갇혀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안의 옳고 그름에 대한 선택의 기준은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내가 정의한 대로 나는 여전히 그러한 사람인 것인가?




이토록 이미 과거에 벌어진 고통스러운 일들과 원망스러운 악연들 그리고 그로 인한 괴로운 감정들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까?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의 일들은 맥락 없이 시도 때도 없이 불쑥불쑥 떠올라 안타깝게도 현재의 시간을 자꾸만 잠식해 버리고 우리는 기억하기조차 힘든 고통스러운 과거의 상황들을 끊임없이 반추하며 하루하루 고통을 더 견고히 하며 살아가고 있다.


게다가 화가 나는 경계를 접했을 때 상대방이 내게 저지른 악행을 반복 생각하다 보면 미움과 원망은 한층 더 과장되고 더욱더 화가 나기 마련이다. 그러니 결국 ‘그 인간은 아주 나쁜 사람이다.‘라고 확신에 찬 정의를 내리고 그로 인해 ‘지금의 나는 여전히 불행하다.’고 결론 내린다. 그러나 이런 일렬의 과정에서 내가 보고 생각하는 것들이 모두 옳다는 생각은 고정된 집착이 되어 허물을 부풀려보게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상대가 마치 고정불변한 존재처럼 ‘그는 아직도 여전히 늘 그러할 것’이라 믿는다.


내가 보는 상대 그리고 내가 보는 나 자신, 그것은 고정된 것일까?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내가 다르고 우리 모두는 항상 변화하고 있다. 그러니 내가 기억하거나 보고 있는 대상은 ‘이러이러한 것이다’라고 고정된 생각을 하는 것은 어찌 보면 이치에 맞지 않는다. 과연 내가 보고 또 기억하고 있는 사실들이 왜곡 없이 모두 진실된 것일까?




우리가 어떤 대상을 보았을 때 보는 즉시 '아름답다' '추하다'등의 분별이 동시다발적으로 순간 발생한다. 마치 색안경을 쓰면 그 색으로 온 세상이 보이듯 내 생각과 관념에 따라 그 대상을 바라보고 분별하여 좋은 느낌 싫어하는 느낌을 만들고, 그로 인해 여러 가지 감정이 연이어 일어난다.

그리고 우리가 미운 대상을 볼 때, 저마다 각자의 인식대로 보고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는다. 그러니 같은 대상을 바라보아도 서로 느끼는 것이 다른 것이다. 우리의 고정된 관념에 의해 부정적인 감정들이 일어나고 이것은 안타깝게도 현실을 바르게 보는 눈을 가려버린다. 그런데 우리는 늘 우리가 보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고 우리가 보는 것이 정말 맞다고 생각한다.



달라이라마 존자님께서 용수보살의 <중론> 법문에서 이렇게 설하셨다.


* 업과 번뇌는 어떻게 제거하는가?

업과 번뇌는 부정적인 감정들이다. 이것은 대상을 정확히 알지 못하는 '무지'로 인해 생겨난다. 제대로 대상을 알지 못하고 제대로 보지 못하는 무지로 인해 번뇌가 생겨난다. 이는 '내가 보고 생각하는 것들이 모두 옳다'라는 생각과 이 고정된 집착으로 인해 분별 망상이 생겨나고 집착하고 대상을 미워한다.

내 관점이 내게 보이는 것, 내가 보는 것, 생각하는 것이 옳지 못하는 것을 배우고 사유하라.



현상계 측면에서 보면 분명 이름 지어지고 작용하고 있다. 눈에 보이며 그렇게 느껴진다. 하지만 내가 보고 생각한 대로, 내가 그 대상의 실재가 이와 같다고 느꼈던 것처럼 존재하는 것은 없다.


'내가 보는 것과 내가 생각하는 것은 사실 진실이 아니다'


내면에 자리한 왜곡된 분별로 상대를 바라보았기에 내가 보는 것들은 사실 진실이 아니다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보는 것처럼 존재하는 바는 어디에도 없다' 내가 생각한 것은 그저 내가 이름 지은 것, 그저 내가 편견에 의해 이름 지어진 것뿐이다. 대상이 실제 그와 같이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보는 것이다.


제대로 알지 못하고 제대로 보지 못하는 무지로 인해 고통인 번뇌가 생겨난다.


고로 우리는 무지로서 대상을 정확하게 보지 못하고 분별하고 망상하며 업과 번뇌를 쌓아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내가 하는 모든 생각과 느낌과 감정은 모두 차곡차곡 저장되어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내 의식에 영향을 준다.


내 기억과 무의식에 저장된 수많은 후회, 미움과 원망들. 어쩌면 그 모든 것은 이렇듯 진실이 아닌 것에서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나는 아직도 대상을 정확히 보는 지혜가 부족하기에 여전히 무지하다. 그러므로 자주 괴롭고 또 고통스럽고 미워하며 번뇌한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내가 생각하는 상대는 진실로 어떤 사람인인가? 과거의 일어났던 일들이 지금도 실재하는가? 과연 내가 보고 생각하고 있는 모든 것이 진실일까? 이런 생각들을 깊게 사유하며 지속적으로 변화를 위해 노력하고 실천하다 보면 언젠가는 서서히 내면에 긍정적인 변화가 시작되리라 믿는다.


그리고 나는 스스로에 대해 어떠한 불행한 정의를 내리고 그게 진실이라 믿고 있는 이들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실은 그 생각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대."라고 속삭이듯 얘기해주고 싶다.


실은 당신의 생각처럼 당신은 나쁜 사람도 아니고 외로운 사람도 아니고 또 더 이상 불행한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과거든 현재든 그 언제의 시간이든 당신을 후회하게 만드는 그 일은 그저 일어날 일이었고 당신은 그 당시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한 거라고 그럼 된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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