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인이 없으면 결과도 없다.
최근 몇 달간 이른 오전 시간과 자기 전, 따로 시간을 내어 윤회도와 12 연기 그리고 사성제 16 행상을 틈틈이 공부했다. 각 명칭과 이론만 대강 알고 있었을 뿐 깊이 공부하지 못했던지라 더없이 소중한 시간, 그날도 어김없이 늦은 밤 조용히 앉아 사성제를 펴고 천천히 필사를 하던 중이었다.
그러다 한 구절에 오래도록 눈과 마음이 머물렀다. “원인이 없으면 결과도 없다." 이는 아마도 사리분별을 할 수 있는 나이만 되어도 당연히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쉽고 명확한 진리이자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구절이다. 그런데 왜 이 구절이 그날 내게 특별하게 다가왔을까. 눈을 감고 가만히 되뇌다 이 명제를 한번 뒤집어 보았다.
'결과가 없다면 원인이 없기 때문이다.'
내 삶의 지난날들을 찬찬히 돌아본다. 아무리 애를 써도 원하는 결과가 없었다면 바로 그 원인이 없었기 때문이구나. 그 원인을 지어놓지 않았던 것은 다름 아닌 나였다. 오랜 세월 이 사실을 그저 머리로만 이해하고 헤매며 살았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뜨거워지고 눈물이 난다. 뒤이어 떠오르는 인과법 그리고 업(Karma). 이다지도 당연하고 명백한 진리를 감사하게도 이제야 조금씩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원인이 없으면 결과도 없다. 어떤 사람들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지만 어떤 방법을 사용해도 목표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이는 이 목표 달성을 가능하게 하는 ”행위 원인“이 이전에 수행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Sans cause il n'y a pas de résultat. Certaines personnes déploient tous leurs efforts pour parvenir à un but, mais quelles que soient les méthodes qu'elles emploient, elles ne peuvent atteindre leur but. Cela est dû au fait que « l'acte-cause » permettant la réalisation de ce but n'a pas été accompli auparavant.
<Les quatre Nobles Vérités du Bouddha et Le yoga du souffle en six points. p 39>
'사성제'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최초 설법이자 불교의 핵심 교리이다.
괴로움이라는 고귀한 진리 (고성제 ·苦聖諦)
괴로움의 원인이라는 고귀한 진리 (집성제 ·集聖諦)
괴로움의 소멸이라는 고귀한 진리 (멸성제 ·滅聖諦)
괴로움을 소멸하는 길이라는 고귀한 진리 (도성제· 道聖諦)
우리는 이 사성제의 가르침을 통해 행복과 불행의 바른 견해가 무엇인지 그 실체를 바로 보고 깊이 사유할 수 있게 된다. 괴로움의 실체를 알아야 그것의 원인을 찾을 수 있고 그래야 괴로움의 소멸과 소멸에 이르는 길 또한 찾을 수가 있다. 우리의 삶 속에는 행복도 있지만 크고 작은 괴로움 또한 끝도 없이 펼쳐진다. 살면서 마주하는 끊임없는 괴로움, 이에는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존재의 실존에서 피할 수 없는 현상들 또한 포함된다.
삶이 괴롭고 오래도록 고단한 시기를 보내고 있다면 대체 이 고통이 왜 내 삶에 자꾸 일어나는지 자주 의문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그 이유는 찾을 수 없고 속수무책 되풀이되는 삶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막막함과 무력감까지 더 해져 괴로움은 더 증폭될 뿐이다.
나 역시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아무리 애를 써도 방법은 찾을 수 없었다. 결국 '내 삶은 왜 이렇게 고통스러울까?'라는 원론적인 주제로 돌아갔다. 모두가 항상 행복하기만 할 수 없을까? 왜 서로 미워하고 질투하고 화를 낼까? 왜 우리는 이렇게 매일 싸워야 할까? 사람은 왜 병들고 늙고 죽어야 할까? 그렇게 왜라는 의문은 꼬리를 물지만 답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답을 찾아 헤매다 결국은 인연이 된 이 소중한 가르침으로 비로소 삶의 진정한 행복과 괴로움이 무엇인지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
모든 생성의 원인은 본질적으로 소멸의 원인이다. 태어났기에 죽는다. 이토록 우리 삶 속의 고통과 행복을 제대로 이해하고 우리의 삶이 무한하지 않다는 것을 염두하고 사는 삶은 지금 이 순간을 더없이 소중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한다.
무상한 것을 항상 하다고 믿는다. 우리는 현재 나의 젊고 건강한 몸, 지금의 행복한 관계,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들, 이 모든 것이 변치 않고 지금처럼 오래 지속될 것으로 믿는다. 그러나 현재의 행복도 불행도 모두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모든 생성된 것은 찰나찰나 변화한다.
우리의 젊음과 건강 역시 영원하지 않다. 우리는 지금도 매 순간 늙어가고 있으며 병이 들고 때가 되면 반드시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혹은 병들고 늙어가기도 전에 예고 없이 젊은 나이에 갑자기 생을 마감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부분은 적어도 내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 생각하며 산다. 이렇듯 생명이 있는 존재라면 한치의 예외 없이 언젠가 이 생과 작별하는 순간이 찾아온다는 것을 평소에 자각하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무지이다.
불교에서는 괴로움을 생, 로, 병, 사 네 가지 고통을 기본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해야 하는 괴로움,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게 되는 괴로움, 원하고 구하는 것을 이루지도 못하고 얻지도 못하는 괴로움 그리고 이러한 괴로움의 근본이 되는 색ㆍ수ㆍ상ㆍ행ㆍ식의 오온에 집착하는 괴로움 이렇게 총 여덟 가지 괴로움으로 크게 나눈다.
집착과 무지는 모든 번뇌의 뿌리이다. 이로 인해 업이 생기며 집착으로 비롯된 갈애와 업은 고통의 원인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싫은 느낌을 주는 것을 피하고 좋은 느낌을 주는 외부의 어떤 대상을 행복의 원천으로 믿고 집착한다.
그러나 영원히 지속되는 행복은 없다. 만족하면 행복하고 결핍을 느끼면 불행하다. 추워서 더운 곳을 찾아 들어가면 따뜻한 행복은 잠시, 시간이 갈수록 더워서 다시 괴로워진다. 현재 내가 처한 환경이나 소유한 물질 등에 아주 만족한다 해도 결국 어딘가에서 결핍이나 불만을 느끼고 더 좋은 것을 원하며 만족하지 못하게 된다.
결국 이러한 집착은 갈애, 성냄, 질투, 오만 등 감정적이고 불만족스러운 느낌을 만들고 그 생각에 이끌려 더 좋은 것을 취하고자 하는 집착을 점점 더 강화시키는데 이 집착이 바로 고통의 원인이다. 고로 모든 고통의 원인은 밖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
열반은 고통의 소멸이다. 고통의 원인인 갈애와 업을 제거함으로써 모든 고통의 원인이 사라진다. 윤회에 다시 나게 하는 이유인 번뇌와 업이 제거되었으므로 이것이 열반이다. 고로 열반은 윤회의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남을 의미한다.
괴로움은 어떻게 소멸하는가. 괴로움이 무엇인지, 그 괴로움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알았으니 괴로움을 소멸하는 길로 가는 바른 수행법은 무엇인가. 이것이 도성제의 핵심이다. 그리고 자성이 공하다는 깨달음, 이를 아는 지혜는 나라는 생각에 대한 집착을 제거하게 하고 모든 번뇌를 제거한다. 이 수행으로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하고 집착이나 망상, 번뇌등 괴로움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깊은 밤, 내 가슴속에 큰 울림을 주었던 구절을 다시 한번 적어본다. '어떤 사람들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지만 어떤 방법을 사용해도 목표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이는 이 목표 달성을 가능하게 하는 ”행위 원인“이 이전에 수행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안타깝지만 이런 일은 모든 이들의 삶 속에서 빈번히 일어난다.
아무리 가진 애를 쓰고 노력을 해도 원하는 것이 결코 이뤄지지 않았던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그게 누군가에게는 꼭 가지고 싶은 직업이나 이루고 싶었던 꿈이 될 수도 있겠고, 혹은 행복한 가정 안에서 살아가는 일 등이 될 수도 있겠다.
내게도 남들에게는 있으나 내게는 없는 것, 내가 가진 애를 써도 이번 생에서는 결코 가지거나 이룰 수 없는 것들 그래서 너무나 가지고 싶고 또 이루고 싶었던 것들이 있었다. 그 간절한 소망은 어느새 욕심이 되고 결국 집착이 되어 나를 더 고통스럽게 했다.
그래서 내가 처한 환경과 바뀌지 않는 불공평한 현실에 원망을 퍼부으며 삶을 증오하기도 했다. 왜 나는 안 되는 거야? 왜 내게는 주어지지 않는 거야? 이런 억울한 마음으로 모든 원망과 비난의 화살을 불 같이 밖으로 퍼부었고 때로는 나 스스로를 공격하기도 했다. 그러니 그런 지난한 삶 속에 짧게나마 주어졌던 행복은 한 겨울의 햇살처럼 너무도 간절했지만 속절없이 짧게 스쳐 지나갔다.
위의 구절을 눈 감고 되네이던 그날 밤, 지금까지 살면서 목표를 세워놓고 중도 포기하거나, 노력보다 과한 결과를 기대했던 경우를 제외하고 아무리 애를 써도 결코 가질 수 없었거나 혹은 이룰 수 없었던 것들을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내가 평생을 그토록 애를 쓰며 소망했던 것. 혹은 지금도 혹시나 하는 마음을 품고 있을지도 모르는 것들. 내가 그리는 이상적인 모습으로 살아갈 수 없던 현실에 애도 많이 쓰고 좌절하며 힘들었던 과거의 기억들이 스친다.
그러나 이제는 그 결과의 원인을 심어놓지 않은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지금의 나의 삶은 바로 지난 생의 궤적이라는 것을 이제야 조금씩 이해한다.
다시 말해 내가 현생의 삶에서 만족하지 못하는 부분, 즉 좋지 않은 결과로 자각하는 부분은 내가 과거에 그 원인의 종자를 심어놓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원하는 결과가 없었다는 것은 바로 그 결과를 낼만한 원인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과가 있으면 원인이 있고 결과가 무상하면 원인도 무상하다. 즉 결과가 생길 수 있는 원인과 조건의 힘이 있어야 한다.
좋은 시절 인연도 좋은 결과도 모두 그 인연과 결과를 낼만한 좋은 원인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언젠가 무르익을 결과를 결정짓는 것은 바로 지금의 나이다. 그러니 이제 앞으로 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현재 삶의 불만족스러운 부분을 끝도 없이 되새기고 과거를 복기하며 불평하거나 혹은 결핍에 집중한 나머지 지금 내가 가진 소중한 것들을 놓친 채 어딘가에 있을 것만 같은 실체 없는 무언가를 계속 찾아다니는 것일까? 아니면 언젠가 반드시 발현될 결과를 위해 지금의 이 시간을 소중하게 살아가는 것일까.
나는 꾸준히 쌓아 올린 작은 노력의 결실을 믿는다. 당장은 변화가 보이지 않아도 좋은 동기를 가지고 무언가를 꾸준히 해 나가다 보면 그것은 훗날 소중한 종자가 되어줄 것이다. 물론 결과가 언제 도래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원인이 있는 한 결과는 반드시 있을 것이다.
'결과가 없었다면 바로 원인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번에 내가 깨닫기 시작한 고귀한 진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