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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동윤 Feb 09. 2024

내게 경제적 자유보다 소중한 것


‘정치적 자유’가 우리 부모세대의 화두였다면, 우리 세대의 화두는 ‘경제적 자유’이다.      


평생직업이라는 말은 있어도 평생직장이라는 말은 개념뿐인 사어(死鋙)가 되어가고 있는 현실에서, 회사라는 울타리 밖에서 소득을 창출하기 위한 시도들이 계속되고 있다. 배달업에 뛰어들기도 하고, 블로그나 소셜 미디어 등을 운영하는 한편, 디자인이나 코딩 등을 배워 ‘디지털 노마드’에 도전하는 이들도 있다. 당장 인스타그램만 들어가 봐도 이런 분위기를 여실히 느낄 수 있다. 기본 만 단위 이상의 팔로워들을 지닌 인플루언서들은 자신들이 회사로부터 탈출해 경제적 자립을 이룬 ‘신화’를 대중에게 공개하고, ‘당신도 할 수 있다’라는 메시지를 던짐으로써 구루로 추앙받는다. 그들 중 일부는 ‘경제적 자유’라는 말을 팔아 경제적 자유를 달성하기도 하지만.     


사람들이 경제적 자유를 꿈꾸는 이유는 간단하다. 회사에 매여있는 지금의 삶이 ‘뭐 같기’ 때문이다. 그저 돈을 벌기 위해 깨어있는 시간 중 적게는 3분의 2, 많게는 거의 모든 시간을 자신이 원치 않는 곳에서 인간관계 스트레스까지 받아가면서 보내는데, 어찌 ‘뭐 같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자연스레 시선은 이러한 곳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 - ‘금수저’나 연예인들 – 에게로 향한다. 그러나, 그들은 쳐다보기엔 너무 ‘높은 산’들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결국 SNS에서 답을 찾는다.      


얼마 전, 나는 비록 파트타임이지만 회사생활에 처음 발을 담갔다. 조선일보에서 독립한 자그마한 인터넷 매체이다. 호기롭게 ‘굶어 죽기’ 좋은 인문대학원 진학을 선택했지만, 주머니 사정은 그리 호기롭지 못했다. 나이가 거의 서른이 되어가는데, 부모로부터 학비를 지원받는 것은 파렴치한이나 하는 짓이라 생각했기에 병행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고심하던 와중에 운 좋게 일을 구했다.      


다행히 일이 크게 힘들지는 않지만, 나는 그 짧은 시간에 세상을 닮아가는 나 자신을 보게 되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일어나기 싫다’란 생각이 몸을 지배하는 것은 물론이고, 기사를 쓰다가도 (특히 연예기사를 쓸 때 그렇다) ‘현타’가 올 때가 있으며, 때로 일이 길어져 피치 못하게 야근을 하게 되면 자꾸 눈이 시계를 탐한다. 또, 다른 직원들에 비해 내가 일하는 것에 비해 얼마를 더 받고 덜 받는지를 신경 쓰는 나를 보면서는 문득 선득해지기도 했다.      


9시가 되면 사람들을 빨아들였다가 6시가 되면 토해내는 이동식 금속 덩어리에 몸을 싣고 있자니, 새삼 옆에 있는 사람들이 대단하게도 느껴졌다. 이들은 어떻게 이 생활을 주 5일 내내, 반평생을 하는 걸까. 이들이 멍하니 초점 없는 눈동자로 스마트폰만 쳐다보는 것이 이해가 갔다. 무엇보다, 이들에게 앞서 말한 ‘경제적 자유’가 얼마나 요원하면서도 또 동시에 간절할 일일지가 느껴졌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말하는 ‘경제적 자유’가 도대체 무엇인지 의문이 생겼다. ‘생계 걱정으로부터의 자유’인가?, 아니면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살 자유’인가? 궁금해서 인터넷을 뒤져봤더니 한 칼럼에서는 ‘돈을 위해 다른 사람이 정한 시간표에 따라 일하지 않고, 운이나 다른 사람의 관대함에 의존하지 않으며,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는 자유’란다. 정리하자면, 물리적, 관계적, 그리고 욕망의 자유의 총합이란 말이다.      


이상적인 말이다. 하지만, 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경제적 자유가 때론 모순적이라고 생각한다. 경제적 자유를 위해 진정한 자유를 희생해야 하기 때문이다. 경제적 자유를 목적으로 하는 순간, 안 그래도 빈약한 우리네 사유의 공간을 온통 ‘경제’가 차지하게 된다. 시간도 마찬가지다. 경제적 자유를 열망하지 않았다면 그 시간에 운동이나 공부, 아니면 차라리 잠이라도 잤을 텐데 그 시간마저 ‘경제’가 떡하니 눌러앉아 버린다. 전에는 오후 6시까지만 바쳤는데 이제는 밤 12시, 주말까지 바치는 꼴이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희생해야 만이 나중에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그러나 나는 두 가지 이유로 그 말에 쉽사리 동의하기 어렵다. 첫 번째로는 그 ‘나중’이 언젠지 어떻게 아느냐는 것이다. 자신에게 진정 필요한 돈이 얼만큼인지도 모르는 채 무작정 모은다면 그 ‘나중’이 언제인지는 그 자신도 모를 수밖에. 사실상 그 ‘나중’은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지 현실로 도래하지 않을 일종의 ‘종말론’적인 관념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또 한 가지 이유는 설사, 본인이 원하는 만큼의 돈을 모았다 한들 과연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장구한 시간을 ‘경제’에 매여 살았는데 일순간에 그 사슬을 끊을 수 있을까. 나의 대답은 ‘아니오’이다. 편협할 수 있지만, 나 자신을 들여다보니, 사람의 마음이 그렇게 한순간에 변하기는 어렵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땅만 보는데 익숙해진 고개는 하늘을 우러러보기에는 과중해지게 마련이다.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그 적은 돈을 가지고서도 조금 더 벌 수 있니 마니 하는 나 자신을 보고 가슴이 선득해졌다. ‘땅에 메이지 않고 하늘을 바라보며 살겠노라’ 하며 영성을 내 평생의 화두로 삼아보자 다짐했건만, 나도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옹졸했다. 생각보다 나의 마음은 땅에 메이기를 좋아했다.       


다행인 것은, 그와 동시에 마음의 다른 한쪽에서는 자유에 대한 열망이 다시 꿈틀거렸다는 것이다. 경제적 자유가 아닌 경제‘로부터의’ 자유 말이다. 물론, 아직 사회경험이 부족한 삼척동자의 객기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부터 하나씩 연습하고 싶다. 가능한 한 맛있는 거 먹고, 좋은 데 놀러 가고, 근사한 물건 사는 데는 관심을 두지 않고 싶다. 익숙해진다면, (매우 어렵겠지만) 미래에 대한 걱정도 하나씩 내려놓는 연습을 하고 싶다.      


마태복음 6장에서 예수는 말했다. 땅에서는 좀과 도둑이 해하니 “너의 재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라”라고 말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쌓아둘 재물조차 없다. 하지만, 그런 만큼 생각과 정신이라도 하늘에 쌓아보려 한다. 비록 날라야 할 이삿짐이 아직 그득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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