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미나리' (2021)
1980년대, 뼛속까지 한국인 이 씨는 가족의 미래를 위해 희망을 찾아 미국으로 이민을 결심한다.
제이콥이라는 영어 이름도 만들고, 아내, 딸 그리고 아들 손을 잡고 캘리포니아를 거쳐 아칸소로 왔다.
일단 도착하기만 하면 술술 풀릴 줄만 알았는데 말도 안 통하는 곳에서 당장 할 수 있는 건 병아리 암수구분하는 일뿐이다 - 그래도 그는 농장 가꿔 한국 채소를 판매하겠다는 꿈이 있기에 묵묵히 버틴다.
하지만 여기까지는 모두 그의 시점이고, 가족들은 뭔 죄인가. 특히 아내 모니카는 그런 남편이 못 미덥다.
시골에 처박혀서 병아리만 보는 것도 힘들고, 컨테이너같이 생긴 집에서 사는 것도 싫고, 막내아들 데이비드의 심장문제도 너무 걱정된다.
매일매일 자녀들이 엿듣는 줄도 모르고 말싸움을 하는 부부 - 행복을 찾아 이곳에 왔지만 현재 미국사회에서 제이콥과 그의 가족들은 희망과 제일 먼 곳에 있는 것만 같다.
제이콥이라는 사람에 집중해 보자.
그는 얼마나 힘들었겠나.
미국이 어딘지도 모르고, 영어 한마디 못하는 상황에서 가족을 위해서 태평양을 건너는 결정을 했다.
한국에서는 번듯한 직장이 있었으리라 - 하지만 모든 것을 내려놓고 처음 미국에 도착해 수년간 병아리 암수 구별하는 일만 했다. 마치 기계처럼.
아내 모니카도 야속하다. 가뜩이나 미국에 데려와서 고생시키는 것 같아 미안해 죽겠는데 자꾸 뭐라고만 한다. 왜 우리 가족을 아칸소 깡촌으로 데려왔냐고 한다, 아이들을 생각한다면 캘리포니아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 거 아니냐고 이기적인 나쁜 놈 취급한다 - 그도 좋아서 왔겠는가? 평생 병아리만 봐서는 아메리칸드림을 이루지 못하기에 농장을 크게 한번 해보려고 하는 거 아닌가.
애들도 한 번쯤 아빠가 뭔가 해내는 거 봐야 될 거 아니야!
가족들과 아이들을 향한 마음을 이렇게 표현해 보지만 아내는 전혀 공감을 못하는 것 같다.
더욱이 부부가 함께 일할 때 둘만 남겨질 어린아이들이 걱정된 그녀가 장모님 (순자)까지 미국에 데려왔다, 아무리 좋은 분이라도 장모님과 졸지에 함께 살아야 하는 것 솔직히 불편하다.
결혼을 빨리했던 시기였던 80년대 그는 많아야 30대 중반 정도 되었을 텐데 아직 여물지 못한 청년에게 가장이라는 굴레는 때로는 너무나 무겁다 - '그도 특별히 강하게 태어난 사람이 아니다, 평범한 사람일 뿐이다'
그래도 죽으란 법은 없었는지 그의 농장사업은 점점 발전해 천신만고 끝에 농작물을 수확했고 한인 마트 거래처까지 확보했다 - 역시 존버는 성공하는구나!
번창하는 그의 사업과 동시에 아이들을 봐주러 한국에서 오신 장모님은 치매 기를 보이기 시작했고 점점 악화되고 있었다.
심장이 아픈 데이비드를 데리고 멀리 가지 말라고 그렇게 당부했는데 계속 깊은 숲 속까지 데려가지를 않나 한국에서 몰래 들여온 미나리를 심어서 자신만의 밭까지 경작해 버렸다. 맙소사.
그러다가 장모님은 마침내 큰 사고를 치는데 제이콥이 일궈놓은 농장 창고에 큰 불을 내버렸다.
그의 아메리칸드림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왔다 - 하지만 장모님이 뭔가 소중한 걸 가르쳐 주신 것만 같다.
이젠 혼자 모든 것을 짊어진 체 아등바등하지 말고 가족 모두가 '원팀'이 되어서 으쌰으쌰 하자는 메시지랄까, 마치 한 줄기씩 자라는 것이 아닌 여러 가지 줄기가 엮여서 무더기로 단단하게 자라는 미나리처럼.
물론 제이콥은 허탈하고 슬프겠지만 주위를 둘러보니 이젠 아내뿐 아니라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는 아이들도 보인다. 아직 그들의 위치는 언더독이 맞지만 함께 뭉쳐서 싸우면 미국사회라는 전쟁터에서 확실히 경쟁력이 있다.
2023년 현재, 그의 가족들은 미국 사회에서 잘 적응해 잘 살고 있을 수도 있다. 물론 '원팀'으로서 말이다.
<사진 출처 - 다음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