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동남아 사랑꾼 Jun 22. 2024

여행을 하는 까닭

여주의 비 오는 날 풍경


자카르타 출장에서 돌아오니 서울 날씨가 동남아 보다 더 푹푹 찐다. 이래서 호주 겨울의 시원한 남서풍이 불어오는 발리가 여행지론 지금이 제철이다. 더위 피하기는 그만한 곳도 없기 때문이다. 발리만은 못해도 자카르타도 괜찮다.


여행이란 익숙한 것으로부터 떠나 익숙함이 고맙고 감사하며 느끼고 오는 게 아닌가 싶다. 그렇지 않으면 비즈니스석 타면 누워 갈 수 있다 해도, 식사가 좀 더 잘 나오고 원하면 라면도 끓여주며, 각종 값비싼 와인을 마실 수 있다 해도 집의 침대만 못하고, 라면로 말하면 집에서 신라면에 계란과 파를 듬뿍 넣고 종갓집 김치만 한가.


평생 해외를 다니느라 비행기는 대충 약 2백 번은 탔고 비즈니스석도 12~13년은 타보았다. 운 좋게도 은퇴 후에도 비즈니스석을 용케 탄다. 하지만 여행은, 특히 해외여행은 '노 땡큐'다. 다만 7시간 비행기에 갇혀 있으면서 소설책 한 권을 아무 생각 없이 읽고  후 과거 직장 동료에게 주고 오는 재미는 있다. 이번 자카르타 출장 중에도 최인호 사망 10주기 기념 '최인호의 인생 꽃밭 정원'을 읽으면서 대작가의 삶도 나랑 진배없이 소소한 일상을 진하게 그린 정도다. 아내와 함께 사는 삶의 소중함을 누누이 힘주어 말한다.


자카르타에서 온 다음 날 6월 토요일 이른 아침 여주 집으로 향한다. 마누라가 뭐 그리 아침 일찍 오냐며 핀잔을 하지만 꾸역 꾸역 여주행 버스에 몸을 싣자마자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일기예보에 따르면 여름 장마라고 한다.


집사람이 얼마 전 장마 전에 비 오는 소리를 듣겠다며 부랴부랴 여주집에 작은 온실을 설치했다. 마누라와 둘째 아들, 히꼬 그리고 나(큰 아들은 서울서 바쁘다), 넷이 1인용 화로에 참숯을 넣어 돼지목살을 구워 먹었다. 집사람이 주문해 놓은 '느린마을' 신상품(12도, 1만 원) 막걸리 한잔을 곁들이며 온실 지붕 위로 우두둑 떨어지는 장맛비를 듣는다. 앞정원과 뒤뜰 야산의 나무들은 그간 더위에 목말랐는지 양껏 비를 흡수한다. 장마가 끝난 후 뙤약볕을 대비해 수분 저장을 하고 있지 않나 싶다. 자 풍성한 잎들도 가을이 되면 햇빛이 줄어듦에 따라 자기 보호를 위해 낙엽으로 변한다. 그게 자연의 이치다. 인생 후반기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정리할 건 정리하고 단촐하게 살아야 한다.


집사람은 비 오는 소리를 들으면 세상만사를 다 잊어버리고 좋다고 한다. 내가 점심 후 낮잠을 자고 난 후까지 멍 때리기를 한다. 비 오는 게 얼마나 좋은지 그는 "알사, 비가 언제까지 와" 묻는다. 내주 화요일까지 온다고 하자 신이 났다.


시골의 삶이란, 더우면 더운 대로,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추우면 추운 대로, 계절의 변화를 자기가 받아들이고 즐거워하는 게 아닌가 하는 과객 수준의 내가 그런 생각을 한다.


친한 후배가 평생직장에서 어려운 일이 생겨 전화가 온다. 목소리가 갔고 전기 저편에선 지친 모습이 역력하다. 난 " 별 거 아니니 너무 상심 마라"라고 했다. "이 또한 지나간다"라고 말해 주었지만 그에게는 무슨 위로가 되겠는가. 차라리 장맛비에도 익숙지 않은 곳으로 훌쩍 여행을 떠나 돌아오면 내가 이렇게 여기에 있다는 자체, 주위의 익숙함이 고마워 작은 위로가 되지 않을까. 그에게 "지방 사찰 어디에 템플 스테이 하며 자연의 소리를 들으보면 어떻겠냐" 라

고 말해 주고 싶다. 배부른 조언일지 모르겠다.


지금 여주의 주말 비 오는 날 오후다.

작가의 이전글 여주의 6월 아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