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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이목 May 11. 2024

비관 속의 긍정

체호프의 <바냐 삼촌>과 <세 자매>

한 번 비관이 마음 한편에 자리 잡게 되면 사람은 쉽사리 삶에 믿음을 갖지 못한다.

그런데 세상에는 참으로 많은 비관이 살아 숨 쉬고 있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의 유명한 첫 문장인 ‘행복한 가정은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에서의 ‘저마다의 불행’처럼 저마다의 비관이 각자의 삶 속에 들이차 있는 것이다. 이런 비관이 감기를 않듯이 우리들의 마음속에 생기는 이유는 부조리 때문일 것이다. 부조리란 세상과 나와의 괴리에서 오는 이질감으로 인해서 생긴다. 자신의 지향과 세상의 지향의 불일치에서 오는 불균형이 우리들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고 괴롭게 만들어서 비관이라는 감기에 걸리게 만드는 것이다. 여하튼 이런 세상과 삶의 부조리 탓에 사람은 언제나 비관과 시름하고 자신과 사투를 벌이면서 불행해진다.


그런 의미에서 안톤 체호프의 희곡인 <바냐 삼촌>과 <세 자매>는 그런 우리의 현실과 비관을 과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여주되 하나의 작은 희망적 대안을 제시한다.

먼저 체호프의 생애를 조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체호프는 아버지의 파산으로 인하여 모스크바의 빈민가에서 지내기도 했고 의사로서 여러 기구한 빈자와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삶을 목도하기도 했다. 또한 자신도 청년시절부터의 객혈과 숙환으로 고생을 하기도 했다. 그런 체호프에게 인간의 삶과 세상이란 그다지 아름다운 것으로 비치지만은 않은 것 같다. 그의 희곡들만 보더라도 그렇다.

과거에 대한 후회로 가득한 채 불만과 불평으로 남은 인생을 지루하게 보내고 있는 우울한 보이니츠키(바냐)와 마찬가지로 불만이 가득한 사람들을 그린 <바냐 삼촌>이나 꿈에 부풀어 있었지만 끝내는 그 어떤 것도 이루지 못한 채로 인생이 지나가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세 자매>는 삶의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다. 특히 그들 속에는 강한 비관이 자리하고 있으며 그 비관으로부터 떨어져 나오려고 갖은 애를 써도 도저히 그 비관을 떨쳐 내버릴 수가 없다. 이는 단순히 자신의 불신과 믿음의 결여로 인한 문제도 있겠지만 그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세상의 어둠도 있다.

희곡 속의 배경들이 하나같이 지루하고 아무런 의미나 가치도 있을 것 같지 않다. 이런 것은 아마도 인물들의 심경이 반영된 것 같지만 실제로도 그곳에는 아무런 변화의 기미를 찾을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은 변화를 원하고 그 변모로 하여금 삶의 비관을 떨쳐 버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지만 앞서 말했던 그런 희망은 무참히 시간과 함께 무뎌질 뿐이다.

체호프는 그런 비관들을 일상 속에서 잘 녹여냈다. 가장 인상 깊은 부분은 그 비관이 강한 햇빛처럼 그들의 삶을 비추고 있음에도 일상은 지속된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평화롭게 그들은 삶은 이어지고 있다. 물론 가끔씩 위험천만한 사건이 벌어지기도 한다. <바냐 삼촌>의 3막 마지막에 보이니츠키의 소동이라던가, <세 자매>에서의 결투와 같은 일상에서 벗어난 일들이 벌어지기도 하지만 이 역시도 우리의 삶에서 별안간 일어나는 기상천외한 일들과 결부시켜 보면 그다지 별난 일도 아니다.

세상이란 언제나 별난 일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것도 갑자기 아무런 예고도 없이 우리들의 삶 속에 무언가를 던져놓고는 반응은 신경 쓰지도 않은 채로 종적을 감춰버린다.

여기까지만 보면 체호프는 사실주의 극작의 거장으로서 일상의 스며들어 있는 비관과 우울함, 그리고 나태를 잘 포착하여 그것을 풍경화처럼 묘사한 것 같다. 그러나 체호프는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서 이러한 비관 속에서도 삶에 대한 긍정의 요소를 찾는다. 그것이 바로 비관 속의 긍정이다.

삶을 포기하지 않는 한, 삶은 계속된다. 삶에서 행복은 길지 않고 대부분은 변덕과 고통의 연속일 것이며 이따금씩은 지나치게 아파서 삶이 증오스럽거나 가증스러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삶에는 먼지와 함께 굴러다니면서 알갱이처럼 작게 반짝이는 행복이 있기도 하다. 그것들은 쉽사리 보이지도 않고 설령 발견해도 순식간에 사그라들어 버린다.  사랑의 순간도 짧은 찰나의 불과하다. 믿음은 유지하기나 너무나 힘들다. 그러나 그 찰나의 행복 덕분에 우리는 산다. 그리고 그 작은 믿음을 갖고 사랑을 하고 당찬 마음을 한번 품어볼 때, 인생은 그 어떤 것보다도 빛나 보인다. ‘그래도 살아야 한다.’는 소냐의 말처럼 살다 보면 기쁨이 넘치기도 하고 미치도록 슬프기도 하지만 살아가는 것을 몸소 느낄 수 있다. 즉 살아가는 것 자체가 '삶의 긍정'이다.

모두에게는 각자의 비관이 있다. 하나 그 각자의 비관 속에는 또 각자의 긍정도 있다. 체호프는 아마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다만 각자의 비관 속의 긍정을 찾는 것이 아직은 서투른 우리들에게 체호프의 작품들은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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