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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이목 May 18. 2024

인간의 슬픔 <상>

<죄와 벌>의 지독한 고통 속의 빛들

인간은 슬픔을 느끼는 존재이다. 슬픔이란 어쩌면 가장 진실되고 투명한 감정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기쁨보다도 더욱 솔직하고 진솔해서 사람으로 하여금 지나친 수치심과 고통을 동반하기도 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죄와 벌>에서 이러한 인간의 슬픔을 '부끄러움'과 '헌신'그리고 '사랑'으로써 표현한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인 마르멜라도프 가족은 제대로 된 경제적인 자립을 할 수 없이 오로지 장녀인 '소냐'에게 의존하고 있으며 '소냐'는 그런 궁핍한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서 '노란 딱지'를 받고 자신을 무참하게 괴롭힌다. 여기서 '노란 딱지'란 당시 러시아에서 매춘을 하는 여성에게 붙이는 일종의 낙인이었다. 그런 낙인을 받은 여자는 모든 존재로부터 멸시를 받는 존재다. 소냐도 마찬가지로 여러 사람들에게서 멸시를 받으며 자신의 '헌신'적인 행동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다.

소냐는 고결한 성품을 가진 인간이다. 그녀는 결코 포기하지 않으며 쉽게 지치지도 않는다. 아니 지친다 하더라도 강인한 인내로 모든 고통과 수난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자신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주인공인 라스콜니코프는 그런 소냐의 성품에 대해서 진심으로 경도되고 경애심을 품고 그녀에게 머리를 조아린다.


'나는 당신에게 절을 한 게 아니야. 전 인간의 고통 앞에 절을 한 거야......'


라스콜니코프는 소냐에게 한 것이 아니라고 말을 했지만 이 말은 분명 소냐로부터 나온 말이고 그녀를 염두에 둔 말이다. 왜냐하면 소냐야말로 '인간의 슬픔'을 안고 사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또한 라스콜니코프는 위대한 인간은 슬픔을 느끼는 인간이라고도 말한다. 인간이 슬픔을 느낀다는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뜻이기도 하다. 부끄러움이란 얼마나 숭고하고 따뜻하며 양심적이고 아름다운 감정인가. 소냐는 자신에게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다. 하나 이 부끄러움은 전혀 그녀의 탓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에게서 부끄러움을 강하게 느끼고 있다. 이는 그녀가 성찰적 인간이자 속죄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성찰과 반성은 부끄러움으로부터 시작되며 그 외에 것으로는 올바른 성찰과 반성을 이룰 수가 없다. 그러니까 소냐는 성찰을 함으로써 자신을 알고 다른 이들의 슬픔도 알며 따라서 라스콜니코프의 고통조차도 안다. 라스콜니코프는 그런 소냐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한다. 오직 소냐에게만.

또 하나, 슬픔은 단순히 개인적인 성찰과 반성의 토대가 아니라 모든 인간을 아우르는 연대의 토대가 될 수 있다. 소냐가 라스콜니코프에게 사랑을 주고 그가 점차 변하기 시작한 것처럼. 인간의 순수한 슬픔은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변모시킨다. 사랑의 실천의 바탕에는 환희와 행복과 같은 긍정적이고 밝은 감정만 있는 것이 아니라 슬픔도 있으며 슬픔 없이는 제대로 된 행복도 진리도 도달할 수 없다. 이는 거짓과 진실의 문제처럼 조금은 모호해도 분명한 것이다. 사랑하는 이의 슬픔을 모른다면 진정한 사랑은 실천될 수 없듯이 말이다. 슬픔을 모르는 사랑은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랑이며 따라서 배반의 위험에도 자유롭지 못하다.

지금까지 부끄러움과 슬픔에 연관성을 이야기했는데 이제는 헌신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다만 헌신이란 조금은 곡해의 여지가 있기도 하다. 헌신이라는 말 안에 희생 또한 내포되어 있는데 기본적으로 누군가의 헌신에는 반드시 희생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냐의 무조건적인 헌신은 이 작품에서 조금은 아쉬운 부분이기도 하다. 순결한 헌신적 자세가 소냐를 인간이 아닌 성녀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만큼 소냐는 하나의 인간적인 인간이라기보다는 지상에 인간의 육신으로 강림한 천사와 같다. 하지만 헌신적 인간이 불가능은 아니며 헌신도 인간적인 것과 거리가 먼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헌신은 수도 없이 많이 존재한다. 인간이 인간다움을 절감할 때가 언제일까? 바로 선행을 베풀 때이다. 그것도 아무런 타산적인 기대감이나 이해관계에 얽매여 있지 않을 때, 발동되는 즉각적인 선행, 즉 슬픔에 의하여 이루어진 연민으로 작동한 선행을 행할 때 인간은 진심으로 따뜻한 사랑의 감촉을 느끼게 된다. 흄이 말한 즉각적인 유쾌한 성질과 같이 즉각적으로 피부에 다가오는 것이다. 헌신은 이와 유사한 행위다. 그러나 헌신은 결코 강요되어서는 아니 되며 살짝이라도 누군가의 개입이 있다면 그것은 헌신이 아니라 그저 소모일 뿐이다. 헌신은 스스로의 힘으로서만 이루어질 때 빛을 발한다. 소냐의 헌신도 마찬가지이다.

부끄러움과 헌신, 이를 채우는 사랑이 인간에게 인간다움을 부여하고 또 채워준다. <죄와 벌>에서는 이런 인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보기 힘들 정도의 가난과 고약함과 궁핍이 존재하지만 그 속에서 사금처럼 빛나는 사랑이 존재한다. 사랑, 사랑은 모든 것을 초월하기도 한다. 그 순간은 찰나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그것은 분명히 존재하는 것도 같다. 어디까지나 순간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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