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수상록
이미 자정이 지난 지 한참이나 지났음에도 잠이 오지 않아서 괴롭게 더위를 삼켜가며 여름의 밤을 보내고 있는 나에게 어느 순간부터 서서히 창밖에서 어떤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귀뚜라미 소리인지 아니면 다른 벌레인지는 알 수 없는 어딘가 익숙하면서 모호한 소리가 들려오자 더위로 기분이 실컷 불쾌해졌던 하루 종일 상념으로 괴롭게 가열되었던 머리가 일순간 평온해지고 시원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 밤의 소리가, 보이지 않는 도시의 별들을 대신해서 강렬하게 빛나는 인간이 만들어낸 무수히 많은 가로등들이 줄지어 선 밝은 청계천의 하얀 물을 바라보며 산보를 하는 연인들 사이를 걷고 있을 때, 느꼈던 편안한 감정과 동일한 동요를 일으킨 것이다. 또는 비가 무진장 내리는 장마철의 어느 똑같이 자정이 넘은 정확한 시간을 알 수 없는 시간의 틈에서 빗소리를 듣고 있는 내가 느꼈던 안정감을 느끼게 한 것이다. 그러자 어떤 벌레인지조차 제대로 가늠하지도 못하는 이 소리가 밤 자체가 내는 소리처럼 여겨졌다.
이 밤의 소리가, 어둡고 거친 차가운 밤이 아니라 낮에 힘들다고 느낄 때나 마음의 응어리가 쌓여가고 있음을 느끼고 답답함을 호소할 때나 아니면 수없이 많은 생활 앞의 미결들이 정신의 미결함에 쌓여가고 있음을 느낄 때 조금이라도 위로를 얻기 위해서 막연하게 상상하는 꿈결과 같이 몽환적이고 미지근한 온도와 부드러운 촉감을 지닌 밤이 자아내는 분위기와 닮아 있다고 느껴지기도 했다. 그 밤은 항상 나의 마음 한편에 뚜렷이 존재하고 있었고 위안를 주었고 오후 8시가 조금 넘은 봄철의 청계천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거기서 나는 정말로 위로를 얻었고 종종 불어오는 바람이 나를 살게 한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밤이 자아내는 바람이 좋았고 실컷 열을 낸 후에 양팔을 축 늘어뜨린 것 같은 서울의 흐물흐물한 밤이 좋았다.
이 밤의 소리가, 나의 머릿속에 해픈 불면을 몰아내고 지금껏 담았던 밤의 조각들을 끄집어낸 것이다. 그리고 내가 왜 살아가는지 혹은 사람들이 어떻게 이 모든 부정과 괴로움에도 불구하고 살아가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것 같았다. 거리에서 들려오는 온갖 비리의 뉴스와 아침에 일어나서 습관처럼 확인하는 일기예보의 밑에 짧게 떠오르는 미세먼지의 농도와 출근을 하거나 아침 일찍 먼 통학을 하는 학생이 느끼는 막연한 허무감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과도한 정보와 풍문이 만들어내는 자동차의 빵빵거리는 소음보다도 시끄러운 소란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낮의 모든 괴로움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 밤의 소리가, 나에게 유독 절실하게 들리는 까닭은 이 순간이 오로지 별을 아무런 방해도 없이 또렷하게 상상할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별이다. 도시에서는 도무지 보이지 않는 별이다. 아주 오래전에 산장으로 놀러 갔을 때, 예기치 못하게 눈 안 가득히 눈물이 고일 정도로 뚫어지게 쳐다볼 정도로 반짝이며 밤하늘을 빼곡하게 채우던 그 장대한 은하수의 별들이다.
별, 바람, 밤이 주는 위무(慰撫). 낮을 견디게 하는 힘은 오로지 밤에서만 나온다는 것을 새벽을 향해서 가고 있는 밤의 결코 빠르지는 않지만 늦는 법이 없는 밤을 통해서 느꼈던 것이다.
이 밤의 소리가, 내가 사는 이유를 잠깐동안 명료하게 보여줬기 때문에 나는 새벽이 되고 저 멀리서부터 서서히 떠오르는 부지런히 올빼미를 몰아내는 태양의 섬광이 창의 뿌연 먼지 낀 유리판에 닿을 때가 되어서야 잠이 들고 오후가 다 되어서야 잠에서 깨어 겨우 일어나 눈곱이 가득 낀 따가운 눈을 애써 비비며 비틀거리며 세면대로 향할 수 있는 것이다. 화장실의 불빛이 눈을 감게 하고 감은 두 눈에 반짝이는 별들을 보여줄 때에도 나는 밤을 상상했고 어김없이 다시금 청계천으로 향해서 도시의 별들을 대신해서 강렬하게 빛나는 인간이 만들어낸 무수히 많은 가로등들이 줄지어 선 밝은 청계천의 하얀 물을 바라보며 산보를 하는 연인들 사이를 걸을 것이다.
지금 나는 일을 하고 있다. 오전 11시 반, 조금 있으면 점심시간이 된다. 8월의 맑은 햇빛이 흰 블라인드를 스친다. 나는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