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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카이브 Jan 29. 2024

돈 주고 분노 받기

2023년 분노를 느끼기에 최적화된 가성비 갑 영화

가가 가가?



24년 1월 20일 기준 1290만 관객 수를 돌파한 <서울의 봄>. 에디터 맹구는 <서울의 봄>을 총 두 번 관람했다. 재관람할 정도로 인상이 깊었다거나 마음에 울림이 있었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딱히 아니었다. 그저 이미 본 영화를 엄마가 같이 보자고 졸라서 한 번 더 같이 봐주었을 뿐. (효녀 노릇 했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확실히 두 번 보니 이해가 더 잘 가기는 했다. 1차 관람 땐 군대 용어도 몰라서 ‘육군참모총장’ = ‘계엄사령관’ = ‘정상호 대장’. 이 셋이 모두 같은 인물을 가리키는지조차 몰랐다. 에디터 맹구는 사람 이름 외우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결국 영화 내내 눈치껏 관람하다가, 중반부 이상 가서는 ‘이 사람이 저 사람이고 그게 이 사람이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허겁지겁 따라가기 바빴으니.



캔유필마핥빝



완벽히 이해는 하지 못했어도 화는 머리끝까지 솟구쳤다. 주먹을 부들대다가 손바닥에 손톱자국까지 낼 지경이었으니 말이다. 맥락 상 ‘무논리 독재 심보’라는 것 즈음은 군대 직책 따위 몰라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50대 우리 엄마는 ‘분노’보다는 ‘슬픔’을 느꼈다고 했다. 특히 수도사령관 정우성과 그의 아내의 서사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그런 걸 보면 유독 20대가 이 영화에 크게 반응한 것 같기도 했다. 주변 친구들의 인스타그램 스토리 중 <서울의 봄> 후기로 추정되는 스토리엔 하나같이 전부 다 가운뎃손가락과 함께 올라와져 있었던 걸 보면 내 주변 20대들은 모두 동일한 포인트에서 분개하였으리라.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 역사책에 ‘군사 반란’이라는 네 글자로 기록되기에는 너무나도 지치고 길었던 9시간의 싸움. 유치하고 치졸하기 짝이 없는 어른들의 밑바닥. 권력에 대한 끝없는 욕심, 그리고 낱낱이 드러난 그들의 무능함. 이 모든 것들이 가감 없이 담긴 영화.

요즘 시대의 민주주의는 심장 박동을 먹고 자라는 듯하다. <1987>, <변호인>, <택시 운전사>와 같은 역사 영화들은 소수의 이익을 위해 희생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다루고 있고, 그 시대를 살아보지 못한 2030세대들로 하여금 간접적으로 그 시대 속에 들어가 보게 만든다. 참혹한 밑바닥을 낱낱이 파헤쳐, 숨겨져 왔던 사실을 다시금 깨닫고, 충격받고, 분노하며 이들의 심장을 다시금 뛰게 만든다. 과거로부터 배운 교훈을 마음속에 다짐하며 미래를 단단히 준비해 나가는 그 과정 속에 이런 역사영화들이 큰 역할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찾아온 봄의 경계에서


“실패하면 반역, 성공하면 혁명 아닙니까!” 열댓 명의 장군들 앞에서 호기롭게 외친 대사가 고작 저거라니.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라는 말과 뭐가 다르다는 것인지. 과정이 어떠하든 간에 결말에 어떤 이름을 붙이느냐에 따라 역사에 다르게 기록된다는 점이 우스우면서도 무력감을 느끼게 만든다.

민주화 시대에 태어난 우리에게 꼭 필요한 영화가 아니었나 싶다. 누군가는 두 다리 뻗고 곤히 자고 있을 시간에 무장한 채로 춥고 먼 길을 왔다 갔다 했던 그들의 고생. 어른들의 말 한마디에 영문도 모르고 서로에게 총구를 겨눈 어린 군인들과 목숨을 잃은 희생양들. 그 해 올 것만 같던 ‘서울의 봄’은 끝내 오지 않았기 때문에. 아니, 어쩌면 왔음에도 살이 떨리고 뼈가 시리도록 추웠기 때문에. 다시 찾아온 우리의 봄이 그 따뜻함을 잃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역사를 올바르게 기억하고 올바르게 공부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에디터 맹구가 생각하는 이 영화만이 말할 수 있는 메시지이자, 이 영화만이 가진 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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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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