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애카이브 Feb 28. 2024

낭만 젊음 사랑

그리고 향기

향으로 기억하는 순간

 배우 정유미는 해외여행을 갈 때마다 여행지에서 산 향수만 뿌리고, 그 향을 맡으며 여행을 추억한다고 했다. 여행지 산 향수라는 것만으로도 그 향수를 볼 때마다 여행지가 생각나기에 충분하겠지만, 그 여행 기간 동안 그 향수만 뿌린다니! 시각적인 요소가 아닌 후각적인 요소로 여행의 순간을 기억하는 것은 정말 낭만적인 것 같다. 여행에서뿐만 아니라 향으로 ‘순간’을 ‘기억’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지, 나에게도 향으로 기억하는 순간이 있을지 궁금해졌다.

 생각해 보니 얼마 전 정말 추웠던 날씨가 확 바뀌었던 날이 있었다. 너무 따뜻하고 맑은 날씨에 신났던 나는 오랜만에 산책을 했다. 걷다 보니 그 날의 분위기가 너무 봄 같았고, 그래서 나는 친구들에게 ‘봄 냄새’가 난다며 카톡을 보냈더라. 이뿐만 아니라, 친구와 석촌호수를 걸으며 “어서 여름이 와서 ‘여름밤 냄새’를 맡으며 산책하고 싶다!”라며 대화를 나눴고, 그때 친구는 내가 말한 여름밤 냄새에 격하게 동의했다. 실체가 없는 추상적인 ‘향’으로 대화가 이어지고, 냄새로 계절을 알아채기도 한다니 도대체 ‘향’이란 무엇일까?



자꾸만 맡고 싶은

 사람에게는 고유의 향이 있다. 친구들은 내 냄새를 좋아한다. 도대체 내 냄새가 뭔가 싶지만, 우리 집에 들어오면 항상 코를 킁킁대며 좋아하던 친구들이 기억난다. 아마 각자의 집에서 나는 섬유유연제 향이 아닐까 싶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유독 섬유유연제 향이 진하고 많이 났던 친구가 있었는데, 나는 그 친구의 냄새를 좋아했다. 그 친구의 집에 놀러 가면 친구의 냄새가 더 진하게 났고, 나는 집으로 돌아와 엄마한테 그 친구한테는 진짜 좋은 향이 난다며 ‘나도 그렇게 좋은 향이 났으면 좋겠다.’고 말했던 것 같다. 엄마는 그 향이 아마도 섬유유연제 향일 거라고 알려주셨고 나는 그때부터 섬유유연제에 집착하며 우리집 섬유유연제는 늘 내가 직접 시향해 보고 골랐다. 이제는 가족들과 따로 살기는 하지만, 엄마는 가끔 내가 어떤 섬유유연제를 쓰는지 궁금하다고 연락온다.

 그러고 보면 같은 가족이라 같은 섬유유연제를 사용하지만, 유독 향이 덜 난다거나 다른 향이 나는 경우도 있다. 특히 우리 엄마는 우리와 같은 섬유유연제를 사용하지만, 엄마만의 특별한 냄새가 났다. 동생과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엄마 냄새는 뭐랄까.. 견주들이 강아지에게 ‘꼬순내’가 난다고 표현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을지.. 아무튼! 우리 엄마도 꼬순내가 있다. 특히 엄마 냄새는 주말 아침에 가장 많이 났던 것 같은데 아침 일찍 출근하는 엄마가 주말에는 나와 동생 옆에 같이 누워서 뒹굴 거리면서 깨워줬기에, 우리가 좋아하는 엄마 냄새는 평일과는 다른 포근한 엄마 냄새였던 것 같다.



냄새가 좋은 네가 좋아

 이렇게 보면 나는 후각이 꽤 예민한 편인 것 같다.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 냄새가 좋은 사람을 좋아하는데, 나도 모르게 냄새가 좋으면 계속 옆에 딱 붙어있고 싶어지기도 한다. 좋아하는 냄새가 콕 집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싫어하는 냄새는 분명 있는 것 같다. 나는 아주아주 쎈, ‘나 향수 뿌렸어요~’하는 향을 가장 싫어한다. 보통의 향수들은 알콜베이스를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나는 그 알코올 향을 맡으면 머리가 너무 아프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원래 향수를 쓰는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그렇기에 나도 향수를 사용하지 않았었다. 그렇게 향수를 쓰는 것에 긍정적이지 않았던 내가 향수로 샤워한 녀석에게 홀딱 빠진 적이 있었는데. 그렇게 그 애가 썼던 향수는 아직까지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향이다.

 처음 그 녀석을 만났을 때 향수 냄새가 너무 심해서 깜짝 놀랐었고, 처음부터 향수 냄새가 심했던 그 녀석을 역시나 별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오는 길, 자꾸 어디선가 그 녀석의 향수 냄새가 나는 것이다.


‘말도 안 돼!’


 집까지 걸어오는 30분 내내 그 녀석의 향수 냄새가 났고, 나는 그 녀석이 진짜 위험한 놈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왜냐하면 내가 그날 입었던 옷과 들고 나갔던 가방에서 너무 진하게 걔 냄새가 났었는데, 처음에는 싫었던 그 향수 냄새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희미해지는 게 더 싫어졌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지하철이나 카페에서 그 비슷한 향만 나면 무조건 그 녀석이 생각났다!

 그렇게 그 녀석과 나는 한동안 가장 친한 베프가 되었고, 걔가 쓰는 향수를 같이 나눠 쓰게 되었다. 얘랑 같이 놀면서 가장 좋았던 것은 얘가 좋아하던 향을 나눴던 것이었다. 가족끼리 같은 향이 나는 것처럼 그 애와 나에게서 같은 향이 나는 게 굉장히 친밀하고, 소중한 관계가 된 것처럼 느겼던 것 같다.


 그런데..! 걔랑 헤어지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가 같이 썼던 향수가 단종된다는 소식을 들려왔다. 그때 나는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더 아껴 뿌릴껄!” 하면서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얼마 남지 않은 향수를 다 써버리면, 이제 우리가 만났던 때가 다 없던 게 되는 것처럼, 갑자기 그 녀석 생각이 나면서 너무 애틋해졌고 심란했다. 물론 다시 새로운 이름으로 재출시된다는 말에 바로 회복했지만 말이다.

 그 얘와 내가 같이 썼던 단종된 그 향수는 이제 그 향수를 썼었던 사람들의 기억 속에만 존재할 것이다. 정유미가 여행지에서의 추억을 향으로 기억하듯, 나도 그 애를 그 향으로 기억할 것 같다. 그저 아무 의미 없이 시간 속에 사라질 뻔한 우리가 재미있게 놀았던 그때를 향수에 담아 향으로 기억할 수 있을 것 같다.



가장 낭만적인 감각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없는 시간을 눈으로 볼 수 없는 향으로 기억하고. 눈으로 볼 수 없는 향으로 흘러가 버린 시간을 기억할 수 있게 하는 ‘향’. 향은 생각보다 엄청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어쩌면 그 자체로 기록하기도, 보관하기도 어려운 향이기에 후각은 우리가 느낄 수 있는 모든 감각 중에서 가장 낭만적인 감각이지 않을까.



-

이지

작가의 이전글 아틸리싸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