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이 달다는 말은 순 다 거짓말이다. 한 모금 목 안으로 삼킬 때 식도를 다 긁는 듯한 알싸함. 위로 들어간 액체가 순식간에 온몸을 타고 뜨거운 증기가 된 듯한 느낌. 초등학교 알코올램프 실험을 하던 그때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었다. 그러고는 지금까지 봐온 그들의 모든 말과 행동들이 이해 가지 않기 시작했다. 맛있는 음식을 생각하면 술이 생각난다는 어른들, 목 넘김이 부드럽다며 광고하는 소주 모델들, 술이 달다고 말한 김새로이까지. 심지어 빙크스의 술을 전하러 간다며 신나는 음악을 연주하던 뭄바 해적단까지 이해할 수 없었다. 술에 대한 로망이 증오로 일그러진 건 한순간이었다.
이해가 되는 말은 하나 있었다. ‘술 마시고 홧김에’. 물론 술 마시고 범죄를 저지른 자들까지 이해가 된다는 뜻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해가 됨은 언어의 영역이다. 그동안 홧김에 말했다는 것은 참으려 노력은 했으나 입이 근질근질해서 등 그래도 자신의 의지가 작용을 하는 부분이었다. 그러나 술은 가슴속에 오르는 열의 운김을 강제적으로 돌게 하여 말을 내뱉게 한다. 마치 증기기관차의 연기처럼. 그래서 그렇게들 술 마시고 고백 공격을 하는 노래들이 많이 나왔구나 싶었다.
술은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들을 하게 만든다. 나는 내 의지에 따르지 않는 말을 하기 싫었고, 술이 본성을 내비친다는 의미를 받아들이는 순간이 오질 않길 바랐다. 간간이 술을 마시면서도 이성이 끊길 정도로 마신적은 없었다. 그렇기에 나는 술을 마셔도 이성과 본성은 붙잡을 수 있는 사람이구나 여겼다. 그리고 이 오만한 생각은 누군가에게 홧김에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저 깊이 묶어둔 속을 내뱉게 된 스물두 살 겨울, 알콜과 함께 날아가고 만다. 그리고 다짐했다. “tlqkf 내가 다시는 취하지 않는다.”
그 이후로는 편했다. 아니 불편했나? 다짐과 함께 몸이 망가졌다. 술을 마시면 몸이 경직되고 위장이 뒤틀렸다. 정말 술만 마시면 위장부터 심장까지 워터파크 파도풀이된 듯 희한한 울림과 함께 기존보다 더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술이 안 받는 체질로 완벽히 바뀌게 되었다. 그때부터 술을 빼기 시작했다. 술만 마시면 몸이 고장 나 견딜 수 없다고, 아픈 게 제일 싫다고 말하며 이리저리 술을 회피했다.
스무 살 이후로 술 자체가 좋았던 적은 없었다. 그래도 사람이 좋아서 술자리는 곧이곧대로 찾아다녔다. 코로나로 4인 제한이 걸리고, 21세기 통행금지령이 걸렸던 시기라 그리 많이는 아니더라도 부르면 나갔다. 당시에는 친한 사람들, 보고 싶었던 사람들, 같이 있으면 즐거운 사람들과만 술을 마셨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런 술자리만 생기진 않으면서 어색한 술자리가 늘어가고 스스로 꼴 보기 싫은 행동이 늘어났다. 맨정신으로 ‘술을 마시고 했던 후회되는 행동 탑텐!’을 꼽을 자신은 없으니 넘어가는 걸로.
내 주위 인물 중에는 술에 지배된 사람들이 몇 있다. 그런 어른들을 보며 무의식에 생각했던 건 술이 그만큼 맛있고 굉장한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라 생각했지만 첫 술을 마신 날 그 로망은 깨졌고, 술에 의해 생긴 후회스러운 행동들이 늘어날수록,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술에 의한 피해가 늘수록 증오는 커졌다. 굳은 벽이 생겼다.
나는 술에 대해 벽을 세우며 완벽히 통제하고 있다 생각했다. 술자리는 뜸해지고 술과는 멀리 떨어지게 되며 평화로운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면서도 술에 대한 욕망은 잠들어있었다. 어쩌면 술에 대해 자유롭고 싶었다. 술을 ‘잘’ 마시고 싶었다. 취하지 않으면서 오래 마시고, 술을 맛있게 마시면서 온전히 즐기고 싶었다. 열등감과 비슷한 듯하다. 웃기지도 않는다. 술에 열등감을 품고 있다니 어리석어 보일 수 있겠지만… 그래도 술에 자유롭고 싶다.
술을 증오한다. 그래도 잘 마시고 싶다. 술이 땡기진 않는다. 사실 술 마시고 싶다. 취하고 싶진 않다. 아니 마음껏 취하고 싶다. 술 마시고 엉엉 울고 싶다. 아니 마시고 박장대소하고 싶다. 술 좋아하는 사람이 싫다. 술 좋아하는 내 친구들이 좋다.
술을 좋아한다. 아니 싫어한다.
엉망진창 모순 덩어리 알콜 쓰레기인 나는 여전히 알콜 콤플렉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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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