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멜리비 May 17. 2024

불편한 감정하고도 친하게 지내기

우리는 엄청 편리해진 세상에서 삽니다. 말 그대로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배고플 때 음식이 30분 안에 문 앞으로 배달되고, 외로우면 친구에게 당장 메시지를 보낼 수 있고, 온라인 포스팅을 하면 바로 좋아요나 댓글로 즉각 주변의 반응을 이끌어낼 수도 있습니다. 지금, 당장, 어떤 욕구라도 아주 빠르게 충족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세상이 편리해지면 편리해질수록, 왠지 더 고립되어 가는 것 같고, 더 외로워지고 불만족스러워지는 건 왜일까요. 즉시 기분을 좋게 할 방법은 수없이 많아졌는데, 불안증이나 우울증의 발생 빈도는 갈수록 증가하는 이유가 뭘까요 (WHO, 2022).


저는 가끔 일상이 편리해지면 편리해질수록 마음은 계속해서 공허해지는 이상한 기분이 들곤 합니다. 그 이유를 상담 심리의 관점에서 찾아본다면, 우리는 갈수록 불편한 감정을 대면할 기회가 갈수록 줄어들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예전에는 불편한 감정이 생기면 가만히 앉아 온전히 느끼고, 이리저리 고민도 해보고, 파고 드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스마트폰이 없는 환경이라면 당장 기분 전환할 방법은 많지 않았으니까요. 예전에는 불편한 감정이 들면 스스로 해소하거나 친구나 가족에게 하소연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일시적일지라도 즉시 기분을 좋게 해줄 방안들이 널려 있습니다. 그래서 안 좋은 감정이 문을 빼꼼히 열고 나오려는 기미만 보여도, 두더지 잡듯 초고속으로 내려치며 덮어버릴 수 있게 된거죠.


막연한 불안감, 그냥 힘 빠지는 느낌, 갑작스런 짜증, 느닷없이 밀려오는 외로움이나 고립감 같은 불편한 감정들은 성가시죠. 하지만 살면서 주변과 부딪혀 가며 자연스럽게 느끼게 되는 감정들입니다. 나의 자아가 주변 환경과 교류하며 발생하는, 하나뿐인 소중한 경험들입니다. 그런데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그 경험을 외면하는 건 내 자아의 일부를 외면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나 자신과의 애착 관점에서 본다면, 마치 어린 아이가 방긋방긋 웃고 있을 때는 예뻐해주다가 아이가 울면 등돌려 버리는 것과도 같죠.


일상 속에서 겪는 불편한 감정을 매번 외면하다 보면, 그런 불편한 감정을 대면하고 해소하는 마음의 근육이 점점 쇠퇴합니다. 몸의 근육도 자꾸 안 쓰다 보면 점점 약해지듯이, 마음의 근육도 점점 약해집니다. 그러다 보면 작은 불편감도 이제는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인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적절히 해소하지 않고 계속 피하거나 부정하다 보면, 불편감이 점점 크게 느껴지는 것과 같은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집니다. 불편한 감정을 일시적으로 피하다가 점점 큰 자극을 찾게 되는 것이 중독의 원리이기도 합니다.


나의 불편한 감정도 중요한 메시지를 머금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나를 너무 몰아붙이고 있는 건 아닌지, 주변인들이 나를 부당하게 대하고 있는 건 아닌지, 내가 나를 하찮게 보며 남에게만 맞춰주고 있는건 아닌지, 어디가 잘못된건지 스스로 살펴야할 때가 왔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는겁니다. 나빠진 기분을 덮어버리기 보다는, 시간을 내어 세심히 살필 줄 알게 되면, 순간의 기분 전환은 안될지라도 내가 나를 소중하게 여기고 존중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어 나 자신과 신뢰를 쌓아 자존감이 올라갑니다. 순간적인 기분 전환을 포기하는 대신, 나한테 지금 진짜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릴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는 겁니다.  


불편한 감정이 느껴지기 시작하면, 스마트폰을 잠시 내려놓고 그 감정을 정리하는 연습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수 존슨 박사는 감정을 다음과 같이 세분화해서 정리하는 법을 추천합니다 (Brubacher & Johnson, 2019):


1)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의 이름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2) 이 감정을 느끼면서 신체적으로 나타나는 증세들을 관찰해보자.

3) 지금 이 감정이 시작된 시점을 생각해보자. 이 감정을 느끼게 된 계기가 무엇이었나?

4) 감정을 느끼게 된 계기에 대한 나의 생각과 판단을 나열해보자.

5)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은 나로 하여금 어떤 행동을 하고 싶게 만드는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나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평소 같으면 바로 잠들기 전까지 들여다보던 핸드폰을 들고 바로 SNS를 켜며 간밤에 업데이트들을 확인하며 기분을 달랠 테지만, 오늘은 그냥 안 좋은 기분 그대로 침대에 누워 있습니다. 내가 느끼는 감정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불안감 같기도 하고, 두려움 같기도 하고, 피곤함 같기도 합니다. 내 몸에서 나타나는 증세들을 쭉 관찰해보니,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고, 윗배가 뭉친 것처럼 긴장되어 있네요. 밤새 이를 악물고 있었는지 턱도 긴장되어 있고, 살짝 아프기까지 합니다. 머리는 무겁고요. 이 감정을 처음 느끼게 된 것은 언제였을까요? 물론 눈 뜨자마자 이 감정을 알아차리긴 했지만, 생각해보니 어제 저녁 직장 동료들과 함께 하는 식사 자리에서부터 기분이 안 좋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왜 갑자기 기분이 다운되었던 걸까요? 아차, 내가 한 말에 직장 동료 하나가 비웃듯이 반응을 해서 창피한 기분이 들었었던 순간이 떠오릅니다. 그 이후로 그 일을 잊으려 딴 생각도 하고 잠들기 전에는 인터넷 쇼핑을 했지만, 아침에 눈 뜨자마자 그 감정이 몰려온거네요. 그 동료의 말에 나는 왜 기분이 안 좋았던 걸까요? 그 동료는 평소에도 남의 험담을 잘 하고, 나를 인정해주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그 동료가 나를 무시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는 왜 상대의 무례한 말 한마디에 바로바로 반응하지 못하고 바보 같이 웃어 넘겼는지, 나는 많이 서툴고 느린 사람이라고 스스로 판단을 내렸네요. 내가 느끼는 지금 이 감정은 막연한 불안감이 아닌, 수치심이었던 거네요. 수치심으로 자신감을 조금 잃어버린 나는, 오늘 출근하지 않고 사람들을 피하고 싶은 생각이 마구 듭니다. 정말이지, 회사 가기가 싫어요.


여기까지 감정을 정리하고 나니 좀 어떤가요? 마음이 조금 차분해지고, 기분은 여전히 좋지는 않지만, 이제는 그 감정과의 대화가 가능합니다. 그 동료는 나한테만 그런게 아니라 남들에게도 평소에 무시하는 듯한 발언들을 해왔고, 어쩌면 나에게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 동료가 스스로 자신감이 없어서 사람들에게 평소에도 그렇게 말하고 다닌게 아니었나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나는 내 발언에 대해서도 스스로 증거를 다시 한번 점검해볼 수 있습니다. 나는 실제로 과거 어떤 프로젝트에서 최선을 다 했고, 상대 팀에서도 좋은 피드백을 받았던 기억을 떠올려 봅니다. 나는 그런 말을 들을 정도로 능력이 없는 사람은 아니에요. 그리고 내가 상대에게 바로 반응하지 못해 나를 지켜주지 못한 것은 안타깝지만, 앞으로는 그런 말을 들었을 때 웃지 않고 정색하는 상상을 하며 연습을 합니다. 이제는 어제의 일이, 그리고 오늘 아침의 기분이 원인도 분명하고, 대처법도 있는 상황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굳이 드라마틱하게 긴급 휴가를 내고 회사를 안 갈 정도의 일은 아니네요. 오늘은 불편한 감정을 방구석에 내동댕이 치는 대신 사이 좋게 손 잡고 씩씩하게 출근합니다.


불편한 감정과 친숙해지기 시작하면, 마음의 근육인 뇌가 작동하는 패턴에 변화가 생긴다고 합니다. 나의 감정을 스스로 관찰하고, 명명하고, 앞뒤 맥락을 파악하는 작업을 하는 동안에는 감정 조절 및 판단에 주로 관여하는 전두엽이 활성화된다고 합니다. 저는 내담자들에게 우리의 전두엽은 마치 몸에서는 복근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 설명합니다. 굳이 식스팩까지는 아닐지라도, 코어 근육이 탄탄한 사람은 어떤 운동을 해도 몸이 가볍고 스스로를 잘 지탱하듯이, 전두엽이 잘 다져진 사람은 일상 생활 속에서 감정 조절이 조금 더 수월합니다. 마음의 근육 중 복근과 같은 핵심 역할을 하는 전두엽이 튼튼해지면 질수록, 우리는 감정의 롤러 코스터에 휘말리기보다는 균형을 다시 잡는 능력이 향상되고, 우울감이나 불안감이 들어도 회복이 빨라지며, 불편한 감정이 들더라도 충동적이고 파괴적인 행동으로 바로 이어지는 빈도수가 줄어듭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좋을 때만 함께하기보다는 힘든 순간에도 나를 버리지 않는, 의리 있는 사람이 되어줄 수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겪는 희노애락을 모두 아우를 수 있는, 더욱 성숙한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연습 1. 잠시 눈을 감고 손을 가슴에 얹고, 지금 막연하게 불편한 감정이 든다면, 그 감정을 묘사할 감정 단어를 3가지만 떠올려보기. 그리고 "나는 지금 OOO 감정을 느끼고 있다"고 혼잣말로 되뇌어 보기.  


연습 2. 그 감정이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는지 역추적해보기.


연습 3. 이 감정은 나에게 어떤 행동을 하고 싶게끔 만드는지 알아차리기. 그리고 좀더 현명한 대처법이 있지는 않을지 잠시 생각해보기.



참고.

Brubacher, L., & Johnson, S. M. (2019). Clarifying the negative cycle in Emotionally Focused Therapy. Encyclopedia of Couple and Family Therapy, 443-448.


World Health Organization. (June 8, 2022). Mental disorders. World Health Organization. https://www.who.int/news-room/fact-sheets/detail/mental-disorders

매거진의 이전글 ‘갈등’을 진짜 잘 하는 사람 되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