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에는 세상에 대한 분노로 가득찬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치인에 대한 분노, 직장 상사에 대한 분노, 시댁에 대한 분노. 아침 출근길 지하철에서 나를 밀치고도 사과 한 마디 없었던 그 인간에 대한 분노. 화라는 감정은 방어 목적으로 진화한 것으로 추측합니다 (Fessler, 2009). 사람이든 동물이든, 자기 영역을 침범 당했다고 인식할 때, 뇌에서는 화라는 감정을 일으켜 공격적인 말이나 행동으로 상대를 저지하려 듭니다. 화는 마치 우리 마음의 보초병 역할을 하는, 건강하고도 필수적인 감정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인간은 동물과 달리, 화가 난다고 해서 이빨을 드러내고 상대를 직접 공격하지 못합니다. 폭력 사용을 옵션에서 빼버린 사회 규범 때문에, 화가 나더라도 우회적으로 표현하거나, 속으로 삭이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흥미롭게도 정신 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 5판 (DSM-5)에는 우리나라에만 존재하는 정신 질환으로 '화병'이 실렸는데, 이는 그만큼 화를 삭이는 것이 우리 나라에서 전통적으로 통용되었던 방식 중 하나였던게 아닐까, 슬쩍 추론해봅니다.
원시인 조상에게는 유용한 감정이었던 화는, 오늘날 우리에게는 자칫 정신 건강을 해칠 수 있는 뜨거운 감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감정 중심 치료법 (Emotion-Focused Therapy)의 선구자인 그린버그 박사에 의하면, 화를 자기 권리를 지켜내는데 활용할 때에는 '단호한 화' (assertive anger)라는 건강한 형태로 나타나지만, 불건강한 화는 아픈 감정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될 수도 있어서, 이때의 화는 기본 감정 (primary emotion)을 대체하는 보조 감정 (secondary emotion)으로 분류합니다 (Dillon et al., 2018).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신체나 영역에 대한 위협보다는, 자기 가치에 대한 위협을 가장 자주 겪지 않나 싶습니다. 누군가 나의 가치를 알아주지 않을 때 정말, 정말 기분 나쁘죠. 무리 생활을 하도록 진화해온 인간에게는 누군가 나를 하찮게 여기는 일이 곧 무리에서 나의 위치가 불안정해지는 일이었고, 무리에서 내쳐진다는 건 생존과도 직결되는 일이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도 무시 당하는 경험을 하면 본능적으로 공포를 느낀다고도 합니다 (Sznycer et al., 2022). 이렇게 자기 가치를 위협 받는 경험을 했다면, 나의 가치를 스스로 규정 짓도록 마인드를 훈련하거나, 자기만의 돈독한 무리를 형성하는데 노력을 들이거나, 실제로 나의 가치를 향상 시키기 위한 자기 개발에 공을 들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이런 건설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우선 나의 아픔을 바로 보고, 그 원인을 정확히 짚어내야 합니다. 이때 나의 아픔을 바로 보는 대신, 화풀이로 바로 넘어간다면, 이때는 화가 방어 목적이 아닌 보조 감정으로 잘못 활용되고 있는 거죠.
나는 특별히 화가 많은 사람인가요. 저는 가끔, 욱하는 기분이 하루에도 몇번씩 들면서 그 기분이 유난히 안 풀리는 날들이 있습니다. 주변에서 수년째, 꾸준히, 나를 화나거나 짜증나게 만들고 있는 사람이 있나요. 이런 경우라면, 화를 조금은 가라앉히고, 그 이면에 있는 감정들을 한번 들여다보는 것도 좋은 연습이더라구요. 나를 화나게 한 사람을 봐주자는 의미에서가 아닌, 내 마음을 보듬어 주면서 그 안에 맺힌 응어리를 풀어준다는 의미에서 말이죠.
정치인에 대해 화가 나 있는 사람들의 내면은 어떨까요. 특정 정치인의 행적이 실망스러워서 그 정치인에 대해 분노가 일 수도 있지만,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현재 나의 삶에 대한 불만족스러움에서 생겨나는 불편한 감정을 외부로 돌린 건 아닌지요. 열심히 살았는데도 학교 동창에 비해 결과가 미미한 데에서 생겨나는 실망감, 자신감의 상실, 우울감. 내가 원하는 이상적인 세상이 너무나도 요원하게 느껴지고, 내가 기대하는 세상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현실을 매일 강요당하는 데에서 오는 아픔은 없는지요.
시댁에 대한 묵은 화가 쌓인 며느리들은 또 어떤 마음일까요. 시댁이 너무 말도 안되는 인간들이라서 그 인간들에 대한 화가 자연스럽게 생겨난 걸수도 있어요.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우리집에서는 귀한 딸로 자랐는데 시댁에서는 2등 시민, 혹은 3등 시민 정도 취급을 받는 데에서 오는 자존감의 상처. 나의 노고를, 내 가족을 위해 견뎌내는 모든 걸 전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분위기 안에서 느끼는 나 자신에 대한 미안함, 서글픔은 없는지요.
직장 상사에 대한 불만이 머리 끝까지 차오른 나의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 직장 상사가 무능력한 데다가 분노조절 장애까지 앓고 있다면 물론 누구나 화가 날 만한 상황이긴 하죠. 하지만 아무리 동료들과의 술자리에서 화풀이를 해도 풀리지 않는 응어리가 남아 있다면, 나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으로부터 나를 지켜내지 못한 나 자신에 대한 미안함, 죄책감, 혹은 생계를 위해 나의 인간다움을 희생해야만 하는 현실에서 느껴지는 무력감이 두려워, 대신 화로 풀려고 한 것은 아닌지요.
나를 아무 이유 없이 밀친 그 인간에 대한 왕짜증은 나의 마음에 대해 무엇을 알려주나요. '요즘 젊은 사람들은 예의를 모른다'던 한 고대 이집트인의 무덤의 글귀에서 볼수 있듯이, 예의 없는 사람들은 태곳적부터 존재해 왔고, 세상이 끝나는 그 날까지도 존재할 예정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 오늘 하루 보고도 다시 보지 않을 그 사람때문에 아침 내내 스트레스를 받고 나의 수명을 스스로 단축시키고 있는걸까요. 외적인 조건으로 사람의 가치를 매기는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지쳐 있는 나의 영혼이 아파서 뒤척거리는 것은 아닌지요. 나도 존중받을 가치가 있고, 누군가 관심과 사랑을 기울여줄 만큼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어서 화가 나는 것은 아닌가요.
이런 식의 자기 돌봄을 나약하다고 폄하할 수 있습니다. 한국처럼 경쟁이 치열한 사회에서 그런 식으로 매번 아프고 서운하고 서글퍼하면 어떻게 맨 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겠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경쟁이 치열하고, 사람을 외적인 조건으로 판단하고 가치를 매기는 사회일수록, 내가 스스로 나의 감정을 돌아보고 챙기지 않으면, 그 누구도 그 결핍을 대신 채워주지 않습니다. 욱하는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마음을 가지런히 정리하지 않으면,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고 내가 원하는 삶을 일구어내는 마라톤을 완주할 가능성도 떨어진다고 봅니다.
화가 난다면, 그 화에 가려져 있는 상처를 들여다보고 살피는 연습을 가끔 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속시원하게 화풀이를 하는 대신, 지금 나의 어떤 욕구가 결핍되어 화라는 감정에 불을 지핀 것인지, 조용히 한번 사색에 잠겨보는 것이야말로 나에 대한 자상한 돌봄이 아닐까 싶습니다.
연습 1. 영화 [인사이드 아웃]이나 웹툰 [유미의 세포들]에서 묘사하는 것처럼 우리 마음 속에는 다양한 캐릭터가 존재한다고 가정해볼까요. 최근 나를 열 받게 한 일이 있었다면, '화'라는 아이를 잠시 달래주고, 그 뒤에 숨은 다른 아이들을전면으로 끌어내어 마음 속으로 대화를 시도해보기. '너는 오늘 어떤 기분이었니?', '너에게 지금 필요한 건 뭐니?'라고, 진심어린 마음으로 물어보기.
연습 2. '화' 뒤에 숨은 아이들이 슬퍼하고 아파하고 있다면, 눈 감고 가슴에 손을 얹고, 그대로 슬퍼하고 아파하도록 시간을 마련해주기. 슬퍼도, 아파도, 이대로 모두 괜찮으니까요.
연습 3. 이 세상의 모든 변화는 나로부터 시작됩니다. 오늘 하루, 누군가에게 작은 배려로 그 사람이 가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참고.
Dillon, A., Timulak, L., & Greenberg, L. S. (2018). Transforming core emotional pain in a course of emotion-focused therapy for depression: A case study. Psychotherapy Research, 28(3), 406-422.
Fessler, D. M. T. (2009). Madmen: An evolutionary perspective on anger and men's violent responses to transgression. In International Handbook of Anger (pp.361-381). Springer: New York.
Sznycer, D., Sell, A., & Dumont, A. (2022). How anger works. Evolution and Human Behavior, 43(2), 122-1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