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내가 스마트폰이 존재하기 이전의 세상을 경험했던 세대라는 사실을 새삼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어느 유튜브 방송에서 두 전문가가 나와, 요즘 GenZ가 밀레니얼 세대에 비해 정신 건강이 많이 안 좋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그 원인을 어릴 때부터 접하는 스마트폰과 SNS에서 찾더라구요.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의 저는 친구들과 정성들여 약속을 잡고 서로 서너 시간씩 대면하며 대화를 나누며 놀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할 일이 별로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오늘날의 GenZ는 실제로 대면하며 관계 속에서 부딪혀 본 경험이 적기 때문에, 관계 속에서의 회복 탄력성(resilience)이 많이 떨어집니다. 게다가 끊임 없이 접하는 이상화된 타인의 모습에 자신감은 떨어지고, 그래서 작은 일에도 불안이나 우울에 쉽게 빠진다는 식의 이야기였습니다.
어느 한 세대를 뭉뚱그려 정의 내리는 일이 어떤 면에서는 의미 있을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꼰대들의 "나때는~"류의 이야기로 빠져들 위험도 있기 때문에, 변하는 세상의 한 가닥을 붙잡아 이해해보려는 노력 정도로 봅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세대에 상관 없이, 내담자들 중에 불안이나 우울 증세가 심한 경우는 대부분 현재에 집중하며 대면하는 능력이 상당히 부족하고, 대신 끊임 없는 정신 마비 (numbing)로 자신의 일상을 억지로 지탱하고 있는 느낌입니다. 무언가에 쫓기듯 계속 해야만 하는 사람들 있죠. 말이든, 일이든, 스마트폰을 보는 일이든요.
밴쿠버의 겨울은 6개월 동안 이어지는 비의 연속입니다. 캐나다의 다른 지역처럼 영하 30-40도의 한파도 아니고 그게 뭐 힘드냐고도 하시겠지만, 직접 겪어보지 않고서는, 계속되는 을씨년스러운 날씨에 무너져내리는 정신과 고갈되는 활력을 설명드릴 방법이 없네요. 11월에는 크리스마스 준비를 하며 알록달록한 불빛으로 마음을 달래고, 1월에는 새해 결심을 하며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지만, 1월 1일의 그 마음이 점점 옅어지는 2-3월이 되면서부터는 정말이지 웃어도 슬픈, 그런 상태가 됩니다. 이 지경이 되면 저도 기분전환이 절실해집니다. 처음에는 잠깐의 기쁨이 필요하다는 마음으로 시작하죠. 아침에 굳이 불빛 환한 카페까지 가서 커피를 마시고 오거나, 살 것도 없는데 눈요기라도 할 겸 다운타운의 가게들을 배회합니다. 그러다 집에 와서는 결국 유튜브 혹은 한국 드라마 무한 시청, 최악의 경우에는 인스타그램 릴스라는 어둠의 종착지에 다다르기도 합니다.
가벼운 기분 전환에서 정신 마비로 넘어가는 경계선은 어디일까 생각해 봅니다. 상담에서 가르치는 기분 전환은, 생각이 자꾸만 부정적인 쪽으로만 고꾸라지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그 악순환을 끊어내는 데 주로 사용됩니다. 실제 연구로도 증명된 방법 중 하나는 30-45분간 핸드폰으로 게임을 하면서 우울증 증세를 일시적으로 완화시키는 겁니다 (Russoniello et al., 2019). 그외에도 짧고 굵게, 산책을 다녀오거나, 집안일을 하거나, 누군가에게 하소연을 하는 경우도 기분 전환에 해당되겠네요.
여기서 중요한 건 짧고 굵게, 그리고 기분 전환이 되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다는 조건이 걸립니다. 그런데 정신 마비는 다릅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알아차리고 그 고리를 끊으려는 의식적인 노력이라기보다는, 막연하게 불편한 감정을 덮어버리거나 회피하고자 하는 목적이 큽니다. 한번 회피한 감정은 점차 그 불편감이 불어나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무언가를 더 하면서 회피해야만 하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상담을 하면서 매번 느끼는건, 정신적으로 힘들어지는 분들은 특징적으로 싫지만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을 회피해왔거나, 자신이 어쩔 수 없는 일을 어떻게든 통제하려 든다는 겁니다. 이외에 다른 요인들도 많이 작용하지만, 이미 안 좋아진 상황에 대처함에 있어서, 반드시 둘 중 하나는 하고 있더라구요. 스스로 정신 마비 활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면, 내가 지금 회피하고 있는 일은 없는지, 또박또박 살펴보거나, 어차피 안 될 일에 불필요하게 부담을 안고 있는 건 아닌지, 찬찬히 살펴보는 걸 추천드립니다. 하던 일을 멈추고 우뚝 서서, 5분간이라도 심호흡을 하며 머리를 식히면서요.
가끔 내담자들로부터 돌아오는 대답은 그냥, 내가 원래 게으른 사람이라서...그런데 제가 봤을 땐, 이 답변이야말로 가장 게으른 답입니다. 엄마 뱃속에서 나오는 순간부터 게으른 사람은 세상에 없습니다. 정말 어디가 어떻게 불편한지, 진지하게 들여다 봐야 합니다. 나는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입니다. 정신 마비의 이면에는 온갖 슬프고 아픈 감정들이 도사리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망감, 패배감, 소외감, 불안감, 고립감. 내게는 어떤 감정들이 알아주기를 기다리고 있나요? 나의 어디가 어떻게, 위로를 갈망하고 있나요?
심리 상담을 통한 치유의 목적은 내담자를 마냥 즐겁고 긍정적인 사람으로 탈바꿈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나의 경험을 온전히 향유할 수 있게 마음의 근력을 키우는 데에 있습니다. 제 기준에서는 멋진 삶이란, 순탄하고 매일 즐거운 삶이 아니라, 스스로 정의한 의미 있는 삶의 목적에 맞게 주어진 과제를 하나하나 해결해 가며, 기쁨과 아픔의 감정 스펙트럼을 모두 대면하고 겪다 가는 삶인 것 같습니다.
연습 1. 내가 주로 활용하는 기분 전환용 활동 3가지만 떠올려보기. 그리고 그 활동의 목적이 기분 전환에서 정신 마비로 넘어가는 시점이 언제인지 현실적으로 정의 내리기.
연습 2. 기분 전환/정신 마비 활동을 마치고 나서 5분간 나의 내면 상태에 집중해보고, 내 기분이 좋아졌는지, 혹은 더 나빠졌는지 평가해보기.
연습 3. 나의 정신 마비 활동 중, 마치고 나면 대체로 기분이 더 나빠지는 활동 하나를 골라, 딱 2주간 끊어보기.
참고.
Russoniello, C. V., Fish, M. T., & O'Brien, K. (2019). The efficacy of playing videogames compared with antidepressants in reducing treatment-resistant symptoms of depression. Games for Health Journal, 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