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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멜리비 Jun 14. 2024

주변에서 나의 치유에 발목을 잡는다면

상담을 통해 나의 욕구를 잘 알아차리는 연습이 어느 정도 진행되면, 주변과의 관계 속에서도 나의 욕구가 채워지지 않는 순간을 알아차리기 시작합니다. 예전에는 그냥 좀 서운했더라도 상대보다는 자신을 탓하던 게 자연스러웠다면, 이제는 내 느낌이 옳다는 확신이 들면서 고집이 생깁니다. 슬슬 화도 납니다. 그래서 내게 필요한 것들을 알리고 당당하게 요구하기 시작하는데, 이 과정에서 주변으로부터 예상 외로 심한 반발에 부딪혀 상처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 지금 관계의 붕괴로 필연적으로 이어져야 하는건 아닙니다. 나의 노력은 오히려 현재 관계를 더욱 건강하고 진정성 있게 가꾸기 위한 첫걸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나의 결핍을 알아차린 후, 그 결핍을 스스로 채우는 법을 터득하기 전에 섣불리 주변인에게 그 결핍을 대신, 알아서 채워줄 것을 요구하는 일이 갈등의 발단이 되는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된 암묵적 룰에 따라 서로 주고 받는 춤사위와 같은 것인데, 그 룰을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바꾸겠다고 선언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새로운 룰이 형성되기 전이라면, 두 사람 사이에 원래 있던 연결감의 근간이 사라집니다. 그리고 춤사위의 스텝이 마구 꼬이기 시작합니다. 나의 결핍 해소의 책임을 주변에 무작정 뒤집어 씌우는 것은 나를 사랑해주는 행위가 아닙니다.   


애착 이론에서는, 어린 시절 주양육자로부터 조건부식 사랑을 받은 사람은 조건에 부합하지 않는 자아의 면면을 철저히 숨기는 법을 배운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성적을 잘 받아왔을 때만 기뻐하는 부모를 둔 아이라면, 성적하고는 무관한, 친구랑 싸워서 서운했던 감정은 설 자리가 없습니다. 아이는 이 애매하고도 불편한 감정을 의식에서 슬며서 치웁니다. 칼 융은 우리가 의식에서 지워버린 부분들을 영혼의 그림자라 부르기도 했고, 조금 더 최근에 나온 심리 치료 기법 중 하나인 내면 가족 체계 치료의 창시자인 리처드 슈왈츠는 이런 현상을 자아의 일부분을 유배 (exile) 보내는 과정이라고 부릅니다 (Schwartz, 2021). 


나의 결핍을 알아차리기 시작했다면, 그 다음 단계로는 유배 보냈던 그 아이를 다시 불러내야 합니다. 그리고 자초지종을 한번 들어주고, 오랜 시간 외면했던 그 아이의 아픔도 달래주어야 합니다.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애도도 충분히 하고, 그 아이가 이제부터라도 설 자리를 마련해주어야 합니다. 친구랑 싸우고 아무렇지 않게 공부에 몰두하던 그 아이는, 어른이 되어서도 배우자와 갈등이 생겼을 때 일이나 취미에 몰두함으로써 갈등을 회피합니다. 그런데 오래 전 유배 보낼 수 밖에 없었던, 친구가 소중했던 그 아이를 다시 불러내고 나면, 배우자와의 건강한 갈등도 견뎌낼 수 있는 어른의 모습이 완성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건, 내가 스스로 내면의 그 아이와의 연결감을 회복하기 이전까지는, 주변에서 아무런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한다는 겁니다. 


내면의 그 아이와는 어떤 식의 대화가 이루어져야 할까요? 내가 어리고 힘이 없어 너를 유배보낼 수 밖에 없었다는 것, 그때의 아픈 마음을 알아주지 않아서 미안하다는 것. 그 아이에게서도, 나 자신에 대해서도 용서를 구하는 것. 그리고 앞으로는 그 아이와 어떤 식으로 소통하며 지낼지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 논의도요. 배우자와의 작은 갈등에도 패닉에 빠져 마음을 닫아 버리던 습관이 있었다면, 이제부터는 패닉이 오더라도 그 마음부터 달래고, 준비가 되면 다시 대화의 물꼬를 트는 것과 같은 계획도 세워볼 수 있겠네요. 오랜 시간 결핍을 안고 살아온 사람에게 제일 중요한 건 상대방의 끊임없는 수용과 안심보다는 누구보다도 내가 나를 지켜낼 수 있다는 나 자신과의 신뢰를 되찾는 일입니다 . 


나와의 신뢰가 회복되면 주변과의 관계에서 저절로 두 가지 변화가 일어납니다. 첫째는 나의 내면의 혼란이 차분히 정돈되어, 주변인들과의 안정적인 대화가 가능해집니다. 자칫하면 대화가 감정 싸움으로 번지던 그때와는 달리, 상대방의 말에도 온전히 주의를 기울이면서도 나의 입장을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런 식의 대화는 막장 싸움이 아닌, 오히려 즐거운 춤사위와 같은 형태를 되찾습니다. 


둘째는 나의 입장이나 요구를 말로 전달해야 하는 상황이 자연스럽게 줄어듭니다. 신기한 일이죠. 나의 결핍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선을 잘 그어야 합니다. 내가 남에게서 받아들일 수 있는 언행의 경계가 확실해져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선을 남이 아무렇지 않게 넘나들도록 내버려두던 시절에는 내가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상대에게도 그 선이 흐릿해보였을 겁니다. 상대 입장에서 봤을 때, 어떤 날은 잘 웃어넘기다가, 어떤 날은 불같이 화를 내기도 하고, 당시에는 괜찮아 보였는데 1년이 지난 시점에서 과거 이야기를 들추는 것과 같은 일관성 없는 행동은 마냥 헷갈리기만 합니다. 반면, 자기 선이 확실한 사람은 상대가 선을 넘으려는 기미만 보여도 순간 표정이 얼어붙거나, 말하다가도 잠시 멈칫하는 것과 같은 무의식적인 반응을 통해 자기 선을 명확하게 전달합니다. 이런 사람들하고는 굳이 갈등을 일으키며 싸울 일도 없어집니다. 


내가 춤사위의 스텝을 바꾸고 싶다면, 우선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그 대안으로 대신 내놓을만한 것이 있어야 그 관계는 유지됩니다. 내 자아의 일부를 유배 보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건 치유의 첫 단계에 불과합니다. 나 자신과의 관계, 그리고 주변인과의 관계 모두 재정립하는 작업은 또 그 나름의 공을 들여야 하는 작업인거죠. 주변에서 나의 치유에 발목을 잡는 사람이 있어 유난히 걸린다면, 나를 위해서도, 그 사람을 위해서도, 더욱 치열하게 나를 사랑해주는 연습을 해보는게 어떨까요. 



연습 1. 최근에 주변인이 나를 화나게 한 일이 있었다면, 우선 내가 생각을 차분하게 할 수 있도록 마음을 가라앉히는 방안 2가지를 마련해보기.


연습 2. 주변과의 갈등이 있었다면,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힌 상태에서, 상대의 잘못에 집중하기보다는 나의 어떤 선을 상대가 넘도록, 내가 내버려둔 것인지 알아내기. 


연습 3. 나의 선을 상대에게 전달하는 연습하기. 이때, 상대를 탓하거나 지적하는 대신, 상대가 선을 넘었을 때 내가 어떤 기분인지를 전달하는 데 중점을 두면서 연습하기.



참고. 

Schwartz, R. C. (2021). No bad parts: Healing trauma and restoring wholeness with the internal family systems model. Sounds Tr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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