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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싹책방 May 15. 2024

맹목적 믿음이 부르는 재앙  - 채 상병의 명복을 빌며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 있는 나날>

 작년 7월 19일, 한 해병대원이 수색 작업을 하다가 익사했다. 사고 당일, 경북 내성천 일대에서 실종자 수색 작전이 이뤄졌다고 한다. 폭우로 인해 실종자가 발생했으니, 하천의 물이 붇고 유속 또한 거셀 것임은 당연했다.

 하지만 이 위험천만한 곳에 십수 명의 해병대원들을 투입하여 수색 작전을 강행하던 중 사고가 일어난 것이었다.


 현장에서 수색이 어렵다고 보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비상식적인 작전을 해병대 사령부에서 밀어붙였다고 한다. 이 사실만으로도 경악스러웠지만,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수색에 투입된 해병대원들에게 구명조끼조차 지급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해병대의 붉은 티셔츠가 잘 보여야 하니 맨몸으로 수색하라는 명령이 있었다고 한다. 보여주기식 사진 한 장으로 남을 해병대의 이미지가 사람 목숨보다 중요했던 것인가.

 몰상식한 명령이 청년의 목숨을 앗아갔으니 관련 책임자들은 마땅한 처벌을 받아야 할 터였다. 이 사건을 조사하던 수사단은 해병대 1사단장을 비롯한 고위 간부들까지 책임을 물었고, 장관은 수사 결과를 문제 삼지 않고 결재했다.


 하지만 곧 사단장은 혐의에서 제외하라는, 누군가의 지시로 인해 장관은 결재를 번복한다. 또한 수사단의 수사 결과 또한 경찰청으로 이첩하지 말라고 지시한다. 이에 수사단은 경북경찰청으로 수사 결과를 이첩하지만, 장관은 이를 다시 회수시킨다. 사령부의 무리한 지시로 인해 한 청년이 목숨을 잃었음에도 사단장의 혐의 사실은 빼라는 지시는 누가 들어도 비정상적이다. 그러나 이 비정상적 수사 지침을 거부한 결과, 수사단장은 항명죄로 보직해임되었다. 현재까지 수사 결과는 마무리되지 않은 상황이다.


 관련 뉴스들을 통해서 이 사건을 1년 가까이 지켜봤기 때문에 의혹을 불러일으킨 인물들의 이름과 직책은 익숙했다. 사단장의 책임을 덜기 위해 상부에서 다급하게 지시를 내리고 사건의 파장을 축소시키려 한 정황들을 찬찬히 살펴보면 무슨 느와르 영화 시나리오를 읽는 듯한 착각이 든다.


 이쯤 되니 몇 가지 의문이 생겼다. 윗선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을(평범한 시민의 입장에서 보기에는 명백하게 잘못된)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 어떻게 그처럼 많은 이들이 궤변을 늘어놓으며 대동단결할 수 있었을까. 그들에게 이제 해병대원의 억울한 죽음은 안중에도 없는 것일까.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 있는 나날>은 1950년대의 영국을 배경으로, 고용주를 모시며 대저택 '달링턴 홀'을 관리해 온 집사 '스티븐스'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 작품은 스티븐스가 영국 서부 지방을 6일 동안 여행하면서 회상하는 과거의 일화들을 중심으로 내용이 전개된다.

 1인칭 주인공 시점의 경우, 서술자인 ‘나’가 자신의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직접 전달함으로써 주인공이 처한 상황이나 그의 내면에 쉽게 몰입할 수 있다. 이 작품도 1인칭 주인공 시점의 소설이며, 스티븐스가 회상하는 1930년대 달링턴 홀에서의 일화들을 통해 그의 가치관이나 사고방식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그의 고용주 '달링턴' 경에게 바치는 절대적인 충성과 믿음, 집사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소명 의식, '품위'에 대한 고찰 등.

 이처럼 스티븐스는 집사의 삶에 자부심을 가지고서 본인의 직분에 충실한 인물이다. 언뜻 보기에는 그가 그토록 집착했던 품위를 갖춘 인물로 묘사된다.


 그러나 작가는 독자들로 하여금 스티븐스의 언행과 사고방식에 점점 거리를 두게 만든다.

 작품의 말미에서 스티븐스가 절대적으로 충성하고 지혜롭다고 믿었던 고용주 ‘달링턴’ 경이 영국에서 나치의 선전 도구로 이용당했음이 밝혀진다. 스티븐스가 믿고 따랐던 주인이 영국 총리와 히틀러의 회담을 주선하는 등 영국과 나치의 가교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스티븐스는 달링턴 경의 판단을 맹목적으로 옳다고 믿는다. 지혜로운 주인께서 오판을 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주인의 계획과 바람이, 심지어 그것이 히틀러를 옹호하는 의도일지라도 무사히 성사되기를 바라며 집사로서의 직무만 묵묵히 수행한다.


 독자가 화자의 이야기나 논평에 의혹을 가지게 만드는 서술자를 '신뢰할 수 없는 서술자'라고 한다. 스티븐스가 커디널 경과 대화하면서 드러내는 맹목적인 복종의 언행으로 서술자와 독자 사이에 비판적인 거리가 생긴다. 서술자인 스티븐스의 이야기를 더는 믿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독자는 주인을 추종하는 스티븐스의 무비판적인 언행과 더불어 그의 삶의 방식에도 의문을 가지게 된다.

 그저 명령에 복종하고 맡은 역할만 충실히 수행하는 스티븐스에게서 나치 전범 아이히만이 떠오른다. 비판적 사고가 실종된 자리에 맹목적인 믿음과 충성이 들어서고 어느 순간부터는 그것이 일상이 되어버린 상태. 해설에서도 언급하듯, 한나 아렌트가 지적한 ‘악의 평범성’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과연 특정 인물을 과실치사 혐의에서 제외하라는, 위에서 하달한 지시와 궤변들을 근거로 한 판단이 그들은 전적으로 옳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정상적인 의혹 제기와 요구를 모두 정치적 공세로 치부하는 동안 희생당한 해병대원의 유가족들은 지금 어떤 심정으로 사태를 바라보고 있을까.

 해병대원의 죽음에 책임을 져야 할 장본인과 그 책임을 덜어주기 위해 수사 곳곳에 관여한 ‘스티븐스’들의 합작으로 어쩌면 죄가 없어질지도 모르겠다. 사고의 책임 소재를 덮고자 개입했던 증거들도 점점 사라지고 있다. 실제 외압 의혹과 관련된 통화 기록은 7월이면 삭제된다고 한다.

 만약 이 모든 것들이 옳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이를 밀어붙였다면 인간으로서의 양심을 저버리는 짓이고, 비정상적 지시와 궤변을 무비판적으로 옳다고 믿고 따른 것이라면 악의 평범성이 발현된 또 하나의 사례일 것이다. 어느 쪽으로 생각해 봐도 답답하기 그지없다.


 작가는 '스티븐스'에게서 희미하지만 변화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는 평생을 주인의 명령에 복종하여 그토록 원했던 품위 있는 집사가 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행 마지막 날, 스티븐스는 한 노인과 대화를 나누면서 자신이 집사로서 살아왔던 인생에서 허망함을 느낀다. 겉으로 보이는 그럴듯한 품위는 갖췄을지 몰라도 주체적인 인간으로서의 삶은 얻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과거 달링턴 홀에서 함께 일했던 켄턴 양과의 사랑을 저버리고 어리석은 주인에게 충성을 다하기 위해 관성적으로 선택한 집사로서의 삶에서는 어떤 주체성도 찾아보기가 어렵다.

 스티븐스처럼 품위라는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그렇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어딘가 잘못되었음에도 맹목적으로 그것을 옳다고 좇는 자들에게는 존경스러운 품위 따위가 생길 리 없다는 점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에 정성을 다하는 것, 부당함에 반발하는 양심, 스티븐스가 놓쳤던 것들이 사실은 진정한 품위의 요건들이 아닌가. 그것도 갖추지 못하겠으면 무엇이 옳고 그른지라도 판단할 줄 알아야 하겠지만 해병대원의 사망 사건과 관련해서는 그조차도 내버린 사람들이 많은 듯하다.

 다만, 허망함을 느끼고 후회한다는 것은 성찰의 시작일 것이다. 이 시대 스티븐스들의 남은 나날들에는 집사로서의 삶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지키는 삶이 전개되기를 바란다.




(이미지 출처: 실종된 해병장병 찾는 특수수색대,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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