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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균탁commune Feb 21. 2023

코뮤니스트의 서랍

피재현 시인

 피재현 시인의 『우는 시간』을 읽고


  정오 무렵이나 오후 두 시 쯤이나

  하여간 좀 덜 부끄러운 시간에

  옛날에 우리 학교 다닐 때처럼

  일제히 사이렌이 울리고

  걸어가던 사람이아직 누워 있던 사람이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방공호 같은 데혹은 그늘 밑담장 밑,

  다리 밑공중화장실 뒤

  하여간 좀 덜 부끄러운 곳에

  모여서 숨어서

  법적으로 의무적으로

  한 십 분쯤 우는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고 나면 다시 걸어도

  다시 누워도 오후 서너 시가 되어도

  이 땅에서 어른으로 사는 게

  좀 덜 부끄러워도 지는

   -우는 시간중에서     


 가끔 눈두덩이가 시뻘게 질 때까지 울고 싶을 때가 있다.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무엇이 그렇게 억울하고 원통한지 모르겠지만 눈이 뽑혀 나올 만큼 울고 싶을 때가 있다. 울기 위해 눈물을 펑펑 쏟아내기 위해 아무도 없는 곳으로, 아무도 볼 수 없는 곳으로 숨어들지만 결국 우는 일이 실패로 끝난 날, 그런 날이면 나는 꼭 이 시를 읽는다. 시인이 ‘어른으로 사는 게’ 너무 부끄러워 누가 보고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펑펑 울며 썼다는 「우는 시간」을 읽는다. 


 

 피재현 시인이 「우는 시간」을 쓴 것은 푸른 바다가 보이는 어느 햇빛 쨍쨍한 날의 오후였단다. 바다를 보고 있었는데 그냥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 내렸단다. 눈물을 허락하지 않는 세상에, 어린 시절부터 눈물은 약한 사람들이나 흘리는 것이라고 배운 세상에 시인은 부끄러운 것도 잊은 채 누가보고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통곡을 했단다. 온 얼굴에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우락부락하게 생긴 아저씨가 푸른 바다를 앞에 두고 큰 소리로 울고 있었다니, 그날 항구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마 어느 누구도 그를 부끄럽다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팽목항에는 울고 있는 시인을 본 많은 사람들이 함께 울었을 것이다. 

 ‘법적으로 의무적으로 한 십 분쯤’ 마음껏 우는 시간이 필요하다던 시인의 말이 시인의 손을 떠나자 모두의 우는 시간이 되었다. 세상에 아픈 것들을 향해 마음껏 울어야함을 깨닫게 해주는 시가 되었다.    

 

  울면서 태어난 인간은 

  살아가면서 그것이 비겁인 줄 알고

  울음을 참는 법을 배웠다

  사실은 울어야 할 때 울지 않고

  애써 고개 돌려 눈물을 감추는 것만큼

  비겁한 일도 없을텐데

  눈물은 제 때 흘러야 하는 강 같은 것인데

  애써 가두어두면 기어이 터지고야 말

  논둑 같은 것인데

   -눈물중에서   

  

「눈물」에서 시인은 울음의 필연성에 대해 말한다. 울음이란 태어나면서부터 시작된 우리의 고유한 권리인데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가르친 울음을 참는 법, 시인은 울음을 참고 있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울음을 참는 것이 비겁한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울음을 참아봐라. 언젠가는 기어이 터지고 만다. 그러니 마음껏 울자.’ 그런데 이쯤에서 의문이 생긴다. 도대체 어떻게? 어떻게 울어야하지? 

    

  눈물을 뚝 뚝 떼어

  -마치 물이 끓고 있는 냄비 속으로

  수제비 반죽을 떼어 던지듯이-

  허공 중에 던졌다

   -눈물 혹은 장마중에서     


 시인은 「눈물 혹은 장마」에 아주 간단히 해답을 내놓았다. 어떻게 울긴, 그냥 일상처럼 우는 거지.      

 피재현 시인을 처음으로 만난 것은 십여 년 전 어느 허름한 식당에서였다. 저녁을 먹을 시간이었지만 우리는 밥 대신 술을 먹었던 것 같다. 안상학 시인과 피재현 시인이 먼저 만나 술을 먹고 있었는지 아니면 안상학 시인과 내가 먼저 만나 술을 먹고 있었는지 기억은 가물가물하지만 어쨌든 우리는 같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있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우리는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둘 다 미치도록 시를 쓰고 싶다는 것. 다만 약간의 차이가 있다면 나는 좋은 시를 쓰고 싶다는 것이었고, 피재현 시인은 좋은 시를 다시 쓰고 싶다는 것이었다. 


 피재현 시인은 1999년에 ≪사람의문학≫ 신인 추천을 통해 등단했다. 학창 시절에는 안동을 대표하는 학생 문학단체인 ‘맥향’을 이끌며 꾸준히 시와 삶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해왔고 졸업 후에는 시민단체를 만들어 소외된 사람들의 편에서 지금껏 삶을 살았다.   

 

  나무를 캐 본 사람은 뿌리가 어떻게 땅을 붙잡고 있는지 안다 바람에 흔들리지 않기 위해 꽃을 피우기 위해 열매를 매달고 꿋꿋하게 서 있기 위해 먼 하늘을 쳐다보기 위해 또한 제 몸뚱아리를 살찌우기 위해 뿌리는 음지에서 음지를 지향한다

   -식목중에서     


 시인이 살아온 삶은 그의 시 「식목」에 잘 드러난다. 꽃을 피우기 위해, 열매를 맺기 위해 음지에서 음지를 지향하며 살아온 삶. 그렇기에 시인은 음지에서 본 많은 것들, 음지에서 흘린 눈물들에 대해 간절히 시로 쓰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날 저녁 우리는 열심히 대화를 나누며 더욱 열심히 시를 쓰자고 말했던 것 같다. 그리고 이름만 남아 있던 ‘안동작가회의’를 다시 이끌어보자고 의기투합했던 것 같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시인과 나의 또 다른 공통점 때문에 몇 년이 지나서야 그 일을 실천에 옮길 수 있었다. 시인과 나의 또 다른 공통점이란 ‘과민성 신중함’, 그 후에도 몇 번이나 그 이야기가 더 있었지만 그 약속은 2017년에서야 이루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 시간 속에서도 많은 차이가 있었나보다. 나는 정말 행동하지 못했는데, 시인은 치열하게 시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질투가 날 정도의 번뜩이는 관찰력으로. 어린 시절부터 몸에 체득한 세상을 향한 치열한 투쟁으로.   

  

  내가 없는 사이 저 나무는 누워있었던 게

  틀림없다

  전에 없이 부스스한 머리며 저 봐라

  낯짝에 아직 지워지지 않은 베개 자국

               …… 

  저 나무는 윗마을 외하리에 다녀온 것이

  틀림없다

  조부 손에 맡겨진 서울내기 같은

  고 계집애 틀림없다

  슬쩍 이는 바람에도 머리채 뒤집으며

  흰 분냄새 풍기던 은사시나무랑

  통정했던 게 틀림없다

   -여행에서 돌아와 나무를 의심하다중에서    

 

 「여행에서 돌아와 나무를 의심하다」는 『우는 시간』의 모든 시편들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다. 짧은 여행에서 돌아와 마을 입구에, 길가에, 마당 한 구석에 가만히 서서 자리를 지켰던 나무를 의심하다니. 힘들 때도, 외로울 때도, 슬플 때도 옆에서 굳건히 서있던 나무를 의심하다니, 꼭 붙어 지낸 세월이 얼마인데 감히 의심을 하다니. 

 하지만 나무는 우리가 생각한 것처럼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잎도, 가지도 심지어 나이테도 조금씩 달라졌을 것이다. 어떤 가지에서는 먼저 자란 잎이 바람에 날려 떨어졌을 테고, 어떤 가지에서는 이제 막 광합성을 시작한 어린잎이 자라기 시작했을 테다. 시인은 누구나 쉽게 느낄 수 없는 나무의 미세한 변화를 감지했다. 그리고 상상 속에서 베개를 베고 누워 잠이 들었을 나무, 윗마을로 아랫마을로 성큼성큼 마실을 다녀왔을 나무, 시인은 나무라는 정적인 생물에 생동감을 불어 넣었다.    

 

  바람이 부는 것은

  뿌리를 탈출하고 싶은 나무의 욕망이다

  지향 없이 간단없이 흔들리다가

  뿌리째 뽑혀 날아가 버리고 싶은,

  밤새 이겨내지 못한 나무의 욕정이다

   -바람 부는 날     


 사소한 것 하나 놓치지 않는 관찰력과 사소한 변화에도 촉이 발동하는 의심, 그리고 풍부한 상상력을 가진 시인이기에 「바람 부는 날」에서 드디어 나무는 욕망의 주체가 된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이 어디 나무뿐이겠는가? 시인에게서는 자연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우리가 사소하게 지나치는 조그만 모든 것들이 다 욕망의 주체며, 울음의 주체다. 

 그의 시집 『우는 시간』은 우리가 평소에 눈여겨보지 않던 모든 것들의 울음을 대신 읽어주는 대변인이며 우리가 마음껏 울 수 있는 욕망의 주체가 되도록 도와주는 매개체다. 그리고 그의 시는 학생운동의 최전방에서, 시민운동의 선두에서, 대안 학교의 실천에서, 치열하게 살아온 삶에서 울음을 참아온 흔적이며 삶을 울음으로 통과한 시인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울음에 대한 진실한 기록이다. 그렇기 때문일까? 나는 삶에 지쳐 울고 싶은 날이 올 때마다 이 시집을 편다. 그리고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은 채, 조금의 부끄러움도 느끼지 않은 채 마음껏 운다.      



피재현 시인

 1967년 경북 안동 출생. 1999년 계간 ≪사람의문학≫을 통해 등단하였으며, 현재 안동작가회의 사무국장을 맡고 있다. 그리고 시를 쓰기 위해 노력하는 나 같은 사람들을 다독이고 이끌어가고 있다. 시집으로는 ≪우는 시간≫이 있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시인의 말처럼 치열하게 ‘사라지고 없는 바람, 냄새, 아우성’에 대해 노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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